이상하다. 숨쉬는데 자꾸 술 냄새가 난다.
그래는 제 소매며 옷깃에 연신 코를 박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낯선 곳에서 잠을 깼을 때가 새벽 다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그리고 옆에서 곤히 잠들어있던 장백기를 보았을 때 그래는 기함하여 그 길로 도망치듯 튀어나왔던 것이다. 휘황찬란한 모텔의 네온사인이 잊혀지지 않는다. 대체 왜. 단 둘이서만. 거기에?
집에 가긴 시간이 모자라고, 도저히 다시 들어갈 순 없을 것 같아 그대로 사무실로 향했다. 편의점에서 칫솔을 사고, 화장실에서 대강 씻기라도 해야겠다. 아무래도 페브리즈라도 사서 뿌려야 하나, 이런 저런 고민을 하며 그래는 피곤에 절은 눈을 꿈벅였다. 마음과 달리 의자에 파묻히듯 앉은 몸은 따라주지 않았다. 속은 울렁거리고 머리는 얻어맞은 듯 하고 전신이 뻐근한 것이, 오늘이 왜 평일인가 나는 누군가 여긴 어딘가 싶었다. 그래는 애써 희미한 기억을 더듬었다.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
장백기X장그래
간밤의 동기회식 때 그래는 알코올에 절어 영혼이 이탈하는 신세계를 경험했다. 어느 순간부터 기억이 필름을 뚝뚝 끊어놓은 것처럼 고르지 못했다. 한석율이 폭탄주를 말았고 술이 술을 불러 위장을 말아먹었을 때에도 자신은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까지 엄청난 속도와 양으로 술을 마셔본 게 처음이기 때문이다. 일단 한석율을 죽여야겠다. 그리고 장백기한테 자초지종을…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좋은 아침이라며 제일 먼저 안영이씨가 말끔한 얼굴로 등장했다. 장그래씨, 괜찮으세요? 어제 집에 못 들어갔나 보네요? 근데… 계속 여기 있었던 건 아니죠? 아, 예. 머쓱하게 인사한 그래가 붕붕 뜬 뒷머리를 누르며 재빨리 화장실로 향했다. 안영이가 가늘게 뜬 눈으로 그런 그래의 뒷모습을 수상쩍게 보았다.
찬물로 얼굴을 세수하고 머리도 대충 수습하던 그래가 단추가 어그러진 셔츠 윗단을 발견하곤 한숨을 쉬었다. 외박했다고 광고하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이건. 어쩐지 아까 안영이의 한심하다는 눈빛이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과장님과 대리님에게도 아무래도 한 소리를 들을 것 같다. 다시 한 번 한석율을 죽여야겠다 생각하며 잘못 채운 단추를 툭툭 풀어내던 그 때, 아무 생각 없이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던 그래의 눈이 크게 떠졌다.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눈을 질끈 감은 그래는 화장실로 들어오는 누군가의 인기척을 들으며 재빨리 비어있는 칸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백기씨, 어제 우리 그래씨 잘 데려다 줬어요?”
“글쎄요. “
“뭔 대답이 그렇게 뜨뜻미지근해? 그렇게 부득불 자기가 데려다 준다고 난리 쳤으면서.”
“제가 언제 또 난리를 쳤습니까?”
한석율과 장백기의 목소리가 웅웅 들려왔다. 화장실 구석에 쪼그려 앉은 그래는 사위가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당장 얼굴을 마주친다면, 그리고 이 모습을 한석율한테 보여준다면 무슨 말이 들을지도 모르겠고 당장 장백기의 얼굴을 보는 것도 영 껄끄러웠다. 일단은 생각이란 걸 좀 해봐야겠다. 저를 데려다 준다던 장백기와 왜 모텔에 있었는가. 왜 단둘이 있었는가. 왜 그런 모습으로 있었는가. 자신의 상태는 왜 이 모양인가. 답이 없는 여러 개의 가정을 떠올리며 그래는 애써 정리한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니야. 사실은 아무 일이 없었을 수도 있다. 애써 자기위로를 하던 그래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셔츠 앞섬을 당겼다. 설마설마 하며 채 풀지 못한 셔츠 안쪽을 들여다보던 그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장백기씨. 저랑 잠깐 얘기 좀 합시다.
-아침부터 데이트 신청입니까?
-좋은 말 할 때 나오는 게 좋을 겁니다.
-설레라. 나쁜 말도 듣고 싶네. 욕 좀 해봐요.
이걸 콱.
그래는 굳이 보지 않아도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쭉 빼고 제 쪽을 쳐다보고 있을 장백기를 생각했다. 입꼬리가 반쯤 비틀려서 빙글빙글 웃고 있을 얼굴이 선했다. 인텔리한 안경 너머로 사실은 짓궂은 눈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안 봐도 뻔하다. 어쩌면 장백기는 한석율보다 더 한 인간일지도 모른다.
그래는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난 후 탕비실로 자리를 옮겼다. 커피를 두어 잔 정도 타고 나면 장백기가 일어나 옥상으로 올 것이다. 제 것을 제외한 믹스커피 한 잔은 물을 홍수처럼 부은 후 그래가 천천히 자리를 옮겼다.
아직 출근한 사람이 많이 없어 옥상엔 아무도 없었다. 한껏 추워진 날씨 탓도 컸을 것이다. 냄새나는 자켓을 걸어놓고 나온 탓에 그래는 찬바람에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양손에 종이컵을 들고 조심히 걸었다. 언제 올라왔는지 저쪽 옥상 난간에 기대어 막 담배에 불을 붙이려던 장백기가 그런 그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반가운 척은. 자신은 이 꼴을 하고 있는데 장백기는 외박이 왠 말이냐 싶을 만큼 어제의 말끔한 모습 그대로였다. 그걸 보니 더 분통이 터져 그래는 언뜻 봐도 맹탕으로 보이는 커피를 장백기에게 내밀었다.
“이렇게 건강까지 신경 안 써줘도 되는데.”
“닥치고 그냥 주는 대로 드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보자고 했어요? 아니, 그것보다 아침에는 왜 먼저 간 겁니까? 내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요?
백기의 물음을 무시하고 그래가 단호한 목소리로 장백기의 이름을 불렀다.
“장백기씨.”
“네.”
뭐가 혼자 그렇게 재밌는 건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채 지우지 못한 장백기를 보며 그래가 푹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제 타이를 잡아당겨 느슨하게 만들고 셔츠의 윗단추를 툭툭 풀어내기 시작했다. 아니, 장그래씨. 아무리 그래도 여기는 야외고, 또 아침이고… 지금은 우리가 일을 해야 할…
뭐래. 그래는 셔츠 깃 한쪽을 젖혀 안쪽의 맨 살을 드러내었다. 허여멀건한 어깨와 목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보기에도 아플 정도로 시뻘건 울혈이 맺혀있었다. 그리고 선명한 잇자국까지. 채 드러나지 않아 감춰진 좀 더 안쪽 사정도 아까 확인한대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봐도, 앞뒤로 봐도, 전후 사정을 모르겠어도 그게 길가다 재수없어 개에 물린 상처는 아니었다. 눈앞의 자식이 개자식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이거 어떡하실 겁니까?”
어이쿠. 이걸 어쩌나. 영혼 없는 감탄사를 뱉던 장백기가 희게 드러나 그새 닭살이 돋은 것 같은 그래의 어깨 위로 재빨리 셔츠를 바로 입혔다. 자극적인 건 좋지만 감기 걸리겠어요.
“어떡하실 거냐구요.”
“장그래씨.”
제 손길로 셔츠 단추도 야무지게 채운 장백기가 여전히 흐트러진 그래의 타이를 쭉 당겨주었다. 옷 매무새를 몇 번 다듬은 후 어깨를 툭툭 치던 손길이 이내 은근하게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 손을 매섭게 쳐내려고 올린 손을 이번에는 장백기가 꽉 그러쥐었다. 당황스런 그래의 시선이 장백기와 맞닿았을 때. 평온한 어조로 장백기가 말했다. 그러니까 장그래씨. 이걸 나 혼자 그랬습니까?
“네?”
“박수도 짝이 맞아야 소리가 나는 겁니다. 장그래씨도 일조하신 거 아닙니까?”
“장백기씨.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제가 무슨…”
잡고 있던 그래의 손을 놓은 백기가 그래의 팔을 잡고 질질 끌어당겨 좀 더 외진 안쪽까지 끌고 갔다. 옥상 입구에서는 바로 보이지는 않는 이른바 사각지대였다. 그래를 벽에 붙여 세워둔 후 장백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이번엔 제 넥타이를 풀어내고 이윽고 셔츠 단추도 풀어내기 시작했다. 장백기씨.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네?
아침부터 본의 아니게 옥상에서 노출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그래의 당황하는 목소리를 뒤로 하고, 장백기는 아까의 저보다 더 거침없이 셔츠를 풀어 내리고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양쪽 깃을 들어 뒤로 제꼈다. 그리고 제 앞으로 뒷모습이 보이도록 돌아섰다.
“보세요.”
“……”
“뭐가 보입니까, 장그래씨?”
그래는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고 제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 제가 본 것이 맞다면, 어제 그곳에 단 둘이 있던 게 맞다면, 그리고 제 몸의 표식이 장백기의 것이 맞다면,
장백기의 등에 수놓아진 저 붉은 자국들이 말하는 건…
“이제 알겠죠?”
어깨를 으쓱하던 장백기가 다시 몸을 돌려 제 옷을 여몄다. 그리고 그래의 앞으로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입술이 닿을 만큼 가깝게 바싹 붙어선 장백기가 그래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제 당신이… 얼마나 뜨거웠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예뻤는지.”
멍하니 초점이 흐려진 그래의 눈동자를 보며 장백기는 제 입을 틀어막고 있던 그래의 손을 끌어내리고는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 비워진 그 자리에, 백기의 뜨거운 입술이 안착했다.
+
“앗, 따갑습니다. 장그래씨. 살살 좀 해줄래요?”
“시끄러워요.”
“그러고 보니 당신, 손톱 좀 잘라야겠어.”
“시끄럽다고 했죠.”
간이커튼을 친 의무실 침대 위에, 백기가 그래에게 등을 보이게 앉아있었다. 이래저래 툴툴거리면서도 그래는 조심스레 연고를 발라주고 있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이 현란한 작품은… 정녕 나의 솜씨가 맞는 건가. 그래는 심난해졌다. 대체 술을 어디로 처먹으면, 제 안의 숨겨진 자아가 깨어나기라도 하는 걸까. 일단 한석율을 죽여야겠다. 그리고 다시는 이 따위로 술을 먹지 않겠다. 다짐의 다짐을 하는 그래의 손길이 점점 느려졌다.
“다 됐습니다.”
“장그래씨는 안 발라도 괜찮아요?”
“저는 제가 바를 거니까 신경 끄시죠.”
“차가워라.”
끙, 소리를 내며 백기가 그래 쪽으로 돌아 마주 앉았다. 연고가 마를 때까지 여전히 상의는 탈의해야 했다. 지난 밤 그런 대형 사고를 쳐놓고서, 또 이런 은근한 분위기 위에 앉아있으려니 왠지 침이 바싹바싹 마르는 두 사람이었다. 장백기는 긴장한 듯한 그래의 표정을 보며 은근하게 운을 띄웠다.
“그런데 장그래씨. 정말로 기억이 안 납니까?”
“네.”
“하나도?”
“그렇습니다. 하나도 기억이 안 납니다.”
아쉽게 됐네요. 난 다 기억이 나는데.
네, 퍽이나 아쉽겠네요. 그래는 영혼 없는 대답을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튼을 열어젖히려고 하는 그 때 밖에서 누군가 뛰어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 속 쓰려 죽겠네. 이 호들갑스러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보나마나 한석율이었다. 하여튼 나이스 타이밍이다. 지금 상황에서 커튼을 열고 나가려니 어쩐지, 또 한번의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그래가 머뭇거리는 사이, 백기가 그런 그래를 뒤에서 끌어당겼다. 품에 폭삭 안기듯 그래의 등 뒤로는 백기의 가슴이 닿아왔고, 어깨 위로는 백기의 양 팔이 제 몸을 가두어왔다. 그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타인의 뜨거운 체온이 얇은 셔츠 바깥으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제 심장 박동이 어느새 귀까지 쿵쿵거린다고 생각했을 때, 백기가 조용히 속삭였다.
“기억이 안 나면, 다시 기억나게 해줄 수 있는데.”
“……”
“어떡할래요? 장그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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