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사고는 끊이지를 않고, 봐야 할 서류들은 늘 차고 넘쳤다. 어젯밤에도 신새벽까지 서류들과 씨름 아닌 씨름을 하다 간신히 소파에 앉아 눈만 붙이고 나온 게 다였다. 덕분에 해준의 컨디션은 계속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출근하자마자 습관처럼 빈속에 진한 커피를 퍼부으며 어지러운 정신을 간신히 다잡으려 노력할 때쯤, 노크소리도 없이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저 꼴 보기 싫은 얼굴의 주인공은 낯짝도 두껍게 또 제 앞에 나타난 것이다.
“여어, 강변호사님. 오늘도 안녕하십니까?”
“안녕 못하겠는데요.”
“오늘도 까칠하시네.”
“덕분에.”
한회장의 막내 아들이자 한량이신 한석율의 등장이었다. 듣기로는 후처에게서 힘들게 본 늦둥이 아들이라고 하는데, 오냐오냐 곱게 자라서 그런지 버릇을 아주 한참을 잘못 들였다. 보나마나 학교생활도 개판이었을 테고, 양아치 아들 뒤치다꺼리 하다 돈이 차고 넘쳐서 결국 몇 년 도피 유학을 보내더니 이제는 무슨 팀 팀장이라고 번듯한 명함도 달게 해줬다. 한마디로 아주 답이 없는 낙하산이었다. 도대체 회사 꼴이 뭐가 되려고… 아, 여기도 정상은 아니었지.
“안 바쁩니까?”
“출근해서 커피 한 잔 마실 여유는 있어서요.”
“나는 한석율씨 때문에 바빠 죽겠습니다.”
“그래요? 우리 강변호사님 밥줄이네, 내가.”
너 아니어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지금.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간신히 삼켜낸 해준은 어느새 맞은 편에서 제 명패가 올라와 있는 책상을 짚고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석율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 눈을 접고 생글생글 웃고 있는 얼굴에도 해준은 침을 뱉을 자신이 있었다.
“사고 좀 그만 쳐.”
“안 그러면 날 봐주기나 하나?”
“한석율.”
“이 참에 얼굴도 보고 좋잖아.”
새파랗게 어린 놈이 어디서 자꾸 수작질인지. 석율은 그 사이 부탁한 커피 한 잔을 건네 받으며 제 비서에게 싸구려 농을 던졌고, 해준은 결국 참다 못해 책상 위의 두통약으로 손을 뻗었다. 너만 보면 머리가 아파. 관심 끄는 데는 성공했나 본데? 도저히 핑퐁처럼 쏟아지는 대화를 끊을 수가 없어 해준은 차라리 입을 다물고 아까 보던 서류로 관심을 돌렸다. 석율은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손가락을 책상에 리듬감 있게 두드리며 그런 해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노골적인 시선에 도저히 활자에 눈이 가지 않아 결국엔 쓰고 있던 안경을 신경질적으로 벗어낸 해준이 미간을 꾹꾹 눌렀다.
“뭐, 더 할 말 있어? 없으면 이만…”
“내가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
“우리 강변호사님은 안 그렇게 생겨서 왜 이런 일 해요?”
해준이 일하는 H사는 몇 년 사이 빠른 성장으로 주목 받는 기업으로 겉은 번드르르 할지언정 그 속은 시커먼 회사였다. 뒤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그 뿌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게 된다면 다들 혀를 내두를 것이었다. 그게 마치 자신과도 같다고 생각한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러게. 나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까. 복잡할 것도 없이 결론은 하나였다.
“별 거 없어. 돈 많이 주니까.”
“……”
해준에게 돈이 들어갈 곳은 아주 많았다. 책임져야 할 것들은 언제나 도처에서 나타나 숨을 조르고 있었다. 왜 배곯고 코피를 한 바가지 흘리며 남들보다 힘들게 공부를 해야 했고, 수석으로 로스쿨을 졸업해서 판검사 자리 다 때려 치우고 여기까지 굴러왔는지를, 그 구질구질한 얘기를 누구에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돈을 쫓아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유명 로펌에서 근무하던 때에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강변호사만 괜찮으면 소개해줄 사람이 있다는 긴밀한 제안에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한회장을 만났다. 선택한 건 바로 제 자신이었다. 결국 제 손으로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온 것이다. 자존심, 명예 뭐 그런 것들. 그래서 구역질이 나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제 집 뒤치다꺼리 하는 것도 힘들어죽겠는데 피같이 어린 놈이 사고치고 도발하는 꼴에 매번 넘어가 울컥하는 자신이 제일 짜증스러웠다. 금 수저 물고 태어난 새끼가 어디서 재수없게, 진짜.
“돈이 최고니까 한석율씨도 한회장님 등쳐먹지 말고, 아무데서나 남자랑 붙어먹어서 기자들 물어오지 좀 말고, 회사 살림 보탬이나 되게 일이나 좀 똑바로 하고.”
“음…”
“이제 애도 아닌데 정신 좀 차리죠. 뒷수습하기도 힘들어 죽겠으니까.”
해준의 표정은 평이했으나 독설은 신랄했다. 석율이 과연 제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줄 지는 모르겠지만 잠깐이나마 속이 시원했다. 석율이 다시 입을 열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강변호사님 말은…”
“……”
“돈 많이 주면 뭐든 하겠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더 해봐.”
“돈 많이 주면 나랑도 자 주나?”
석율의 말에 해준의 동작이 뚝 멎었다. 모욕적인 말에 자기도 모르게 두 눈이 질끈 감겼다 뜨였다. 석율은 반쯤 마시다 만 커피를 대충 내려놓고 그런 해준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뜨거운 손이 해준의 턱을 들어 시선을 맞추게 했다. 잔뜩 흔들리고 있는 제 눈을 보고 비웃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석율의 표정엔 장난기가 없었다. 속을 알 수 없는 깊은 눈빛만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잠시간의 동요가 무색하게 해준이 곧 석율의 손을 급히 쳐냈다. 목을 가다듬고 애써 평정심을 되찾으려 했다. 손은 떨리고, 숨은 꽉 막혔다.
“농담이 과하네.”
“농담 전혀 아닌데.”
“저기, 한석율씨. 난 일단 게이가 아니고…”
“게이 맞잖아. 냄새 풀풀 나는데?”
씨발 새끼가, 진짜. 결국 참다못해 나온 욕지거리에 석율이 낄낄거리고 책상을 두드리며 요란하게도 웃었다. 아까의 진지했던 표정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제는 뭐가 진짜인지, 알 수가 없다.
“와, 안 그래도 듣고 싶었는데. 우리 변호사님은 욕하는 목소리도 엄청 섹시하네요. 새삼스럽게 또 반하겠어.”
“더 듣고 싶어?”
“사양할게요. 그럼 전 이만, 누구 말씀처럼 일이나 똑바로 하러 가드리죠.”
치고 빠질 타이밍은 또 귀신같이 알아서, 석율은 자리에서 일어나 팔랑거리는 걸음으로 문으로 향했다. 빨리 꺼져 제발. 아침부터 사람 속 그만 뒤집고. 해준의 소리 없는 외침을 들은 건지 석율이 반쯤 열었던 문고리를 잡고 뒤를 돌았다.
“오늘 저녁에 밥이나 한 끼 해요.”
“……”
“우리 영감님 호.텔.에 이번에 새로 바뀐 셰프가 그렇게 죽여준다던데.”
문을 닫고 나오자 마자 벽 너머로 뭔가가 요란하게 박살 나고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맘에 든다는 듯 석율의 입 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놀란 얼굴을 한 비서에게 스윗하게 윙크를 날리는 여유도 잊지 않았다. 단정한 건 몽땅 흩트려 놔야 제 맛이지. 스위트룸이나 미리 잡아 놓을까? 업무와는 전혀 상관 없는 생각만 하며 제 사무실로 향하는 석율의 발걸음이 한없이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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