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접촉사고였다. 그렇게 생각했다. 초보운전 딱지를 채 떼지도 못한 새 차에다가, 차주인 젊은 여성은 앞차에서 내린 해준을 두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해준은 먼저 상대를 안정시킨 뒤 제 어깨며 목을 몇 바퀴 돌려본 후 대수롭지 않을 것 같아 일단 명함을 교환하고 차는 수리를 맡기기로 합의했다. 출근시간이 아슬아슬해서 그대로 택시를 잡아타고 시계를 보니 이미 약간의 지각이 예상되었다. 원인터 출근 이래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강대리 아직이야? 차과장의 물음에 백기는 제 옆자리를 흘깃 쳐다보았다. 2년 가까이 출근한 자신조차도 사수의 지각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살다 보니 별 일이야. 연락 한 번 해보지 그래? 차과장의 말에 백기는 그러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철강.. 1팀.. 강해준 대리님. 전화번호부 목록에서 여전히 삭막하게 저장된 이름을 찾아내 통화 버튼을 막 누르기 직전에 출입문을 열고 해준이 나타났다.
“꼴이 왜 그래?”
“오다가 사고가 좀 있었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목례를 하고 자리를 찾아 걸어오는 해준의 대답이 너무 평소와 같아서 정말 별 거 아닌 일인 줄 알았다만 백기는 막상 제 옆에 선 해준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하자마자 기함해야 했다. 해준은 오른쪽 다리를 절뚝거리고 있었고 관자놀이 옆으로 흘러내린 새빨간 피가 아직 굳지도 않은 상태였다. 가, 강대리님? 백기의 당황하는 목소리와 동시에 차과장의 호통이 들렸다.
“자네 날 악덕상사로 만들 셈이야?!”
“과장님.”
“장백기씨. 얼른 자네 사수 병원 데려다 주고 와!”
저 진짜 괜찮습니... 내가 안 괜찮으니까 제발 병원 가. 그 꼴로 회사 돌아다니면 나 진짜 오래 살아야 돼. 장백기씨가 책임지고 같이 병원 갔다가 와. 심하면 연차 써도 뭐라 안 할테니까 연락하고. 차과장의 성화에 백기는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한 뒤 해준의 팔을 끌고 나왔다.
“닦으세요, 좀.”
“아…”
“지혈해야 하니까 꽉 누르고 계시구요.”
백기가 제 손수건으로 해준의 얼굴을 덮었을 때 그제서야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마 찢어졌나 보네. 오늘 점심 메뉴를 말하듯 매우 무난한 어조로 중얼거린 해준이 백기가 쥐어준 손수건을 붙들었다. 고맙습니다, 장백기씨. 아침의 갑작스런 사고부터 지금까지 사실 해준은 좀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백기는 작게 한숨을 쉬고 혼이 빠진 듯한 해준을 데리고 로비를 빠져나가 택시를 잡아탔다.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가달라는 요청에 기사는 백미러로 해준을 흘끔 보더니 엑셀을 밟아댔다.
찢어진 이마 몇 바늘을 꼬맸다. 그것도 빨리 낫겠다고 마취를 안 하려 드는 걸 간신히 말렸다. 절뚝거리던 오른쪽 발목은 거동이 불편할 정도는 아니지만 살짝 인대가 늘어났다고 했다. 군데군데 타박상 부위에 약을 바르고 진통소염제를 처방 받았다. 심한 부상은 아니라고 해도 그리 가벼워 보이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교통사고는 후유증이 심하다고 하지 않았나?
“대리님, 괜찮으십니까? 그냥 오늘은 집에 들어가시는 게…”
“괜찮습니다.”
“제가 안 괜찮아 보여서 그럽니다.”
“응, 나 괜찮아. 정말 괜찮아요.”
약 기운에 취했는지 돌아오는 대답이 평소답지 않다. 하나도 안 괜찮은 얼굴로 괜찮다고 말하고 있는 주제에, 사무실로 복귀하겠다고 우기는 해준을 말리던 백기는 해준의 고집에 두손 두발 다 들었다.
“그럼 있다가 힘들면 오후에 반차 쓰시는 겁니다.”
“나 진짜로 괜찮다니까요.”
해준의 마지막 대답엔 약간의 짜증이 묻어있었다. 이 이상 볶아봤자 별 소득도 없을 것 같아 백기는 묵묵히 회사로 돌아갈 택시를 잡았다. 잠깐의 거리에도 피곤한지 두 눈을 꿈벅거리던 해준은 막상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강대리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그 날도 평소의 패턴처럼 정신 없이 바쁜 업무를 마친 채로 정시에 퇴근했다. 내일 봅시다, 하는 인사에도 백기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 지독하다, 정말.
괜찮다고 했는데 자고 일어나니 생각보다 영 상황이 괜찮지는 않았다. 퇴근 후 긴장이 풀린 몸이 제멋대로 몸살을 몰고 온 것이다. 푹 잠긴 목이 따끔거리는데다 온몸에 뜨끈뜨끈한 열감이 일었다. 덩달아 전신을 두드려 맞은 듯한 근육통도 함께 덮쳐왔다. 해준은 빈속에 생수와 진통제를 털어 넣고 약속대로 정시에 출근을 했다. 차를 정비소에 맡긴 터라 출근길에는 택시를 이용해야 했다. 다행히 내일은 주말이라 빨리 업무를 마치고 퇴근을 하는 것이 오늘 해준의 가장 큰 목표였다. 그리고 오늘따라 자꾸만 끈질기게 따라붙는 제 부사수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 또한.
“주세요.”
“……”
백기는 해준이 옮기려고 끙끙대던 박스를 가벼운 손길로 뺏어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해준 자신도 번쩍번쩍 들고 옮기는데 문제가 전혀 없었겠으나 지금은 근육통에 지배당한 팔과 어깨가 도저히 제 말을 듣지 않았다. 괜찮다는 데도 자재실까지 따라 들어온 백기를 해준은 조금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상태였다. 일단 몸 상태가 좋지 않았고 제 자존심 상 남한테 폐 끼치는 것은 더더욱 싫은 일이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들 수 있습니다.”
“……”
해준은 백기의 손에서 다시 박스를 뺏어 들었다. 묵직하게 느껴지는 무게에 허리가 잠깐 휘청거리는 것을 보고 백기는 기가 차 웃었다. 오늘 따라 뭘 가리려 했는지 셔츠 위에 평소 안 입던 가디건까지 챙겨 입은 데다 얼굴은 하얗게 질려 식은땀 범벅에, 박스를 들고 있는 팔은 벌벌 떨리고 있는 주제에 어디서 센 척이야. 사람을 이런 식으로도 열 받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백기는 지금 해준을 보며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저 지긋지긋한 괜찮다는 말은, 대체 사람이 어디까지 견뎌야 허용이 되는 범위란 말인가. 내 눈엔 도저히 못 견디는 것처럼 보이는데. 화가 울컥 올라와 생각보다 말이 앞섰다.
“그 괜찮다는 말 좀 안 할 수 없어요?”
“……”
“대리님. 진짜 자꾸 이러실래요?”
“장백기씨.”
“저 미치는 거 보려고 이러시는 거죠?”
백기는 막 박스를 내려놓은 해준의 어깨를 쥐어 뒤로 밀쳤다. 별 힘도 들이지 않았는데 철제 선반에 해준의 등이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생각보다 통증이 심한지 해준의 입에서는 절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안으로 웅크려지는 몸이, 손에 잡힌 어깨가 이미 펄펄 끓고 있다는 것에 백기는 이번에야 말로 욕이 튀어나올 뻔 했다.
“약은요.”
“먹었습니다.”
“그럼 밥은요. 이렇게 열이 나는데 해열제는 왜 안 먹는데요.”
“내가 왜 그걸 장백기씨한테…”
“강해준 진짜 너 이럴래?!”
빽 하고 제 화에 못 이겨 소리를 지르는 백기를 해준은 열이 올라 벌개진 눈으로 쳐다보았다. 사수가 제 몸 하나 간수 못한다고 해서, 이다지도 화를 낼 일인가 이게? 거기다 말은 또 왜 짧아져? 욱신거리는 등을 펴고 백기의 손길을 털어낸 해준이 미간을 잔뜩 찌뿌린 채로 제 이마를 짚었다.
“소리지르지 마요. 머리 울려. 그리고.”
“……”
“반말하지 마.”
해준은 백기를 밀어냈다. 패기와는 다르게 쉽사리 밀리는 몸을 지나쳐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애써 중심을 잡았다. 자재실을 나서려 발을 옮기는 찰나 등 뒤로 허망하게 꽂히는 백기의 시선이 느껴졌다. 해준은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괜찮으니까, 장백기씨 일이나 보세요. 다른데다 정신 팔지 말고 시키는 일이나 잘 하란 말입니다. 스스로 듣기에도 꽤나 쌀쌀맞은 목소리였다. 해준이 빠져 나온 문 뒤로 백기가 뭔가를 내리치는 듯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무시하고 해준은 앞만 보고 걸었다. 지금은 너무나 피로했고 쓸데 없는 감정 소모에 힘을 쓸 기운도 없었다. 이성이 약해진 틈을 타 제 부사수에게 휘둘리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해준은 열이 올라 흐릿한 시야에 눈을 몇 번 깜박거렸다. 바닥이 핑그르르 돌다가 다시 까마득하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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