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년 날씨를 크게 웃도는 기온이라고 했다. 적막한 거실에는 습관적으로 틀어놓은 TV가 홀로 외로이 떠들고 있었다. 아침 뉴스의 끝자락, 오늘의 날씨를 들으면서 해준은 마저 출근을 준비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각 잡힌 셔츠를 골라 입고, 질서정연하게 잘 걸려있는 타이들 중에 아무렇게나 손을 뻗다가 자기도 모르게 집었던 것을, 제 취향은 아닌 조금 화려한 타이를 손에 들고 한참을 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것을 내려놓고 적당한 패턴의 다른 타이를 꺼내어 목에 매었다. 겨울 내내 걸쳤던 코트를 오늘은 입을까 말까 잠깐 고민하다가 습관처럼 껴입고 집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내내 올려다 본 하늘은 무척이나 맑았다. 실려오는 바람에는 찬기가 없었고 사람들의 옷차림이 확실히 전보다 가벼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속 추웠다. 아직 두꺼운 겨울 이불을 들여놓지도 못했다. 바닥이 절절 끓을 정도로 보일러 온도를 올려도 늘 공기가 차가운 것처럼 몸이 떨렸다. 그리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해준은 코트를 입고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앞을 여미었다. 초록의 색을 덧입어 가는 나무들을 보다가 어느새 꽃이 필 무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야흐로 봄이었다.
강대리, 안 더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해준의 옆에 동식이 나란히 섰다. 동식의 가벼운 수트 차림과는 확연히 대조될 만큼 이 따뜻한 날씨에도 두꺼운 코트로 온 몸을 꽁꽁 싸맨 해준의 모습을 보며 동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추위도 안 타서 한 겨울에도 단벌 차림이던 녀석이 올해는 왜 이런담. 의문스러운 동식의 말에 해준은 그냥 웃었다. 나도 요새는 내가 좀 이상한 것 같긴 한데.
“그러게. 왜 이렇게 추위를 타지.”
“그러고 보니 너 얼굴색도 영 안 좋고. 살도 좀 내린 거 같은데.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아무 것도 아니야. 이러다 말겠지.”
“난 강해준 니가 하는 말 중에 그 말이 제일 무섭더라.”
아무것도 아니다. 신경 쓰지 마라. 괜찮다. 해준의 습관적인 말 중에 정말 아무 것도 아니고 괜찮은 일이 동식의 기억으론 별로 없었다. 오늘 따라 희게 질린 표정 없는 얼굴에 동식은 이상하게 마음이 쓰였다. 가끔 저렇게 텅 비어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강해준이란 사람이. 그러지 말고 병원이라도 가봐. 너도 이제 마냥 젊은 거 아니다? 동식의 농 서린 진담에 해준은 희미하게 웃었다. 저렇게 하는 말이 걱정하는 마음이라는 걸 알아서 고마웠다.
하루 종일 마른 기침을 달고 사는 주제에 회의며 보고며 바쁘게 오전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더니 목구멍이 따끔하고 몸은 으슬으슬했다. 아무래도 지긋지긋한 목 감기가 올 것 같았다. 11시까지 거래처에 넘겨줄 자료를 준비하기 위해 바쁘게 돌아왔을 때, 해준의 자리에 아직도 김이 올라오는 따뜻한 차가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티백 한 박스. 목 감기약.
“장백기씨, 이거 백기 씨가 준 겁니까?”
“아닌데요. 아까 천과장님이…”
어차피 알면서도 그걸 굳이 물었다. 확인사살을 받자마자 뒷말을 더 들을 생각도 못 하고 해준이 자리에 놓인 약과 차를 들었다. 급하게 화장실로 걸어 들어와 차는 개수대에 붓고 약과 박스는 그대로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화장실 마지막 칸을 쾅 소리가 나게 닫자마자 그대로 무너지듯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참 쓸데 없이, 아직도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그의 낯익은 친절이 역겨웠다. 오랜 습관처럼 서로를 너무 잘 안다는 것이 아주 지긋지긋하고 넌더리가 났다. 하, 탄성처럼 길게 한숨을 뱉고 나서 해준은 제 눈을 손등으로 꾹꾹 눌렀다. 눈가로 열이 확 몰렸지만 더 이상 흘리기에는 눈물도 아까웠다.
“이럴 거면 버리지나 말던가, 버렸으면 이러지나 말던가…”
익숙한 브랜드의 티백, 늘 목 감기가 오면 챙겨 먹였던 특정 브랜드의 감기약, 열이 오른 뜨끈한 몸을 꽉 안아주던 다정한 품, 해준아 하고 다정하게 부르던 목소리, 아프지 마 하고 머리를 쓰다듬던… 그래서 두터운 이불이 없어도 한 겨울에도 항상 따뜻했던…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했던 그가 이제는 정말로 내 것이 아니니까. 그럴 수가 없으니까.
“춥다… 추워 죽겠다, 정말.”
해준은 양팔로 제 몸을 가득 끌어안았다. 이가 딱딱 부딪힐 만큼 깊은 곳에서 강한 추위가 밀려왔다. 이렇듯 불쑥 밀려오는 외로움이라는 큰 파도에 해준은 몇 번이고 머리끝까지 잠겼다가 간신히 숨을 토해냈다. 얼음장 같은 몸이 자꾸 안쪽에서부터 얼어붙었다. 해준은 결국 참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낮은 울음을 꺽꺽 토해냈다.
그 누가 봄이 온다고 했을까. 아직도 한참이나 멀었는데.
해준은 내내 겨울의 한 가운데에 홀로 서 있었다. 언제 끝날지 모를 아주 길고 긴 계절이었다.
처음이자 아마 마지막일 전력 6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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