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지긋할 정도로 하루 종일 내리던 비는 아직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끈적하고 축축한 습기가 온몸을 감싸는 이런 날씨를 성준은 싫어했다. 괜스레 사람을 쓸데없는 감상에 빠지게 만드는 이 빌어먹을 날씨. 샤워를 마치고 냉장고에서 막 꺼낸 캔맥주의 팝탑을 당긴 성준이 소파 앞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자동으로 리모컨을 든 손가락은 의미 없이 채널이나 돌리고 있었으나 머릿속에는 퇴근길에 뭔가 들떠 보이던 해준의 얼굴만 또렷하게 생각이 났다. 성준은 해준이 가끔씩 그런 보기 드문 표정을 하는 이유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 새끼 만나러 가는 거지, 병신 새끼. 그리고 아마도, 이쯤이면. 성준은 열 시를 향해가는 시계를 흘끔 보다가 맥주를 목울대로 크게 한 모금 넘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텅 비워진 캔을 구기더니 또 새 캔으로 손을 뻗었다.
초인종이 울렸을 때는 이미 자정이 얼마 남지 않았을 시간이었다. 오늘은 기필코 이 구질구질하고 지긋지긋한 관계를 끊어내고야 말겠다고 다짐하며 아까부터 맥주를 몇 캔을 비웠으면서,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반사적으로 일으켜지는 몸을 우뚝 세우며 성준은 스스로에게 자조했다. 대체 누가 누굴 보고 병신이라 하는 건지. 한번을 울리고 나서 이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현관문 너머를 상상하며 성준은 천천히 차가운 바닥에 제 맨발을 내디뎠다.
“누구세요.”
“……”
누군지 뻔히 알면서도 누구냐고 물었다. 반쯤 열린 현관문 너머로 서있는 해준 역시 매번 그랬다시피 아무런 말도 없었다. 우산은 어디다 버리고 왔는지 이 날씨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어 입술을 덜덜 떨고 있는 해준을 보며 성준은 자연스럽게 뻗어나가려는 손끝을 간신히 참아내고, 그게 못마땅한 듯 괜히 제 뒷머리나 긁다가 혀를 찼다.
“…뭐야, 또 너냐.”
“……”
답이 없는 해준의 얼굴을, 성준은 읽을 수가 없었다. 매번 무슨 마음으로 여기를 찾아오는 건지도. 해준은 늘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제가 상처 받고 힘들 때마다 이 현관문 앞에 서서 들어갈 수 있도록 성준의 허락을 기다렸다. 그래, 너는 니 상처만 생각하지. 너를 기다리는 내 마음 따윈 안중에도 없지.
“너 말야. 니가 필요할 때만 찾아오는데.”
“……”
“내가 대체 널 언제까지 받아줘야 되는 거냐.”
이번에는 성준도 일부러 해준의 표정을 읽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바닥만 보고 서서, 부러 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너를 너무 좋아하고, 그걸 뻔히 아는 네가 나를 이렇게 이용하고, 너에게 휘둘리고 다시 홀로 후회하게 되는 이 끝도 없는 악순환을 끊어내고 싶어서. 이제, 그만.
“…나, 너. 감당 안 된다. 돌아가.”
이제는 더 이상 저를 받아줄 수 없다고 하는 말에 해준의 표정이 흐려졌다. 드디어 감정이 드러난 그 얼굴을, 또 다시 반복된 상처에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만들었다는 것에 성준은 그 순간 아주 잠깐 기묘한 희열을 느꼈다. 알았…어. 해준의 푹 숙여진 고개 사이로 보이는, 희게 질린 볼을 타고 흐르는 무언가를 발견하기 전까지만 해도.
“야, 잠깐.”
급하게 손목을 부여잡자 해준은 제 얼굴을 숨기려는 듯 몸을 틀었다. 자꾸만 빠져나가려는 손목을 성준은 더 단단히 붙잡고서 다시 물었다. 너, 울어? 이미 비에 흠뻑 젖어 있어 몰랐는데 해준은 아까부터 울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라고 대답하고 있으면서 비가 내리는 것처럼 애달픈 얼굴 위로 눈물 줄기가 소리도 없이 줄줄이 흘러내리는 꼴에, 그 처연한 모습에, 푹 젖어서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에 성준은 여태껏 간신히 쌓아왔던 제 이성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야, 강해준!”
“…놔.”
“내가 어떻게! 너 지금, 울고 있잖아!!”
그것도 내 앞에서. 도대체 어디서 얼마나 대단한 상처를 받아왔길래 이러는 거야. 성준은 눈을 질끈 감고는 욕을 내뱉으며 붙잡은 해준의 손목을 제 쪽으로 강하게 잡아당겼다. 힘없이 끌려오는 몸을 그대로 현관문 안으로 끌어당기고 젖은 몸을 와락 끌어안으니 두 사람의 등 뒤로 현관문이 거세게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로 해준의 등을 닫힌 문으로 밀어붙이자 해준이 팔을 들어 제 목을 가득 감싸 안고 매달렸다. 성준은 해준의 허리를 한 팔로 단단히 끌어 안고 그대로 고개를 틀어 해준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삼키듯이 맞붙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눈물에 젖어 차게 식은 입술이 열리는 순간, 그 아찔한 감각에 성준은 체념했다. 그래, 진즉 알고는 있었다. 내가 너를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넌, 그걸 너무 잘 알아, 강해준.
너, 진짜 개새끼야. 알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내가 제일 병신 같아.
쵸파님의 생일선물을 받고 써발긴 글ㅠㅠㅠ 그림을 떼오고 싶다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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