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준해준] 사랑이 어색해



설풋 잠이 들었을 때였다. 도어락 버튼이 빠르게 눌리는 소리, 이윽고 열렸던 현관문이 닫히고 신발이 어수선하게 벗겨지는 소리와 함께 그다지 조심스럽지 못한 발걸음이 울렸다. 가방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집어 던지더니 입고 있었던 겉옷을 차마 벗을 생각도 못했는지 침대 옆자리로 바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아, 죽겠다. 쩍쩍 갈라진 목으로 중얼거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해준이 감았던 눈을 떴다. 씻어. 씻고 누워. 제 말에도 미동이 없는 몸에 해준이 고개를 옆으로 틀어 엎드려 있는 성준을 보았다. 야, 하성준. 반응이 없길래 이번에는 너른 등을 흔들었다. 그러자 그 새 기절하듯 잠이 들려는지 5분만, 해준아. 나 잠깐만 이대로 있자. 하며 외려 몸을 틀어 제 몸을 와락 끌어안는 게 아닌가. 뭐라고 더 잔소리를 하려다가 해준도 결국 입을 다물었다. 



벌써 며칠 째였더라. 큰 거 하나 물어왔다는 게 빈말은 아닌지 벌써 2주째 빠듯한 야근이었다. 왼쪽 어깨에 닿는 까슬한 수염을 느끼면서 해준은 최근 성준의 얼굴이 많이 상했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원래 아침에는 죽어도 밥을 먹어야 한다는 체질의 성준도 요새는 부족한 잠을 1분이라도 더 자는 게 먼저였다. 오늘 아침도 부스스하게 일어나 급하게 출근을 준비하던 성준이 이상하게 바지가 커졌다고 툴툴거렸었다. 해준은 맞닿아있는 성준의 허리춤으로 제 손을 가져갔다. 손바닥으로 동그랗게 배를 쓸어보니 예전보다는 확실히 홀쭉해진 게 느껴졌다. 만질 맛이 있어서 좋아했었는데 좀 아쉽네. 빨리 찌워야겠다. 약이라도 좀 지어줄까, 생각만 하는데 배 위에 있는 제 손 위로 성준의 큰 손이 포개어졌다. 만지지 마. 흥분 돼. 피곤해서 제대로 세우지도 못하는 게 꼭 말로만 저러지. 안 그래도 안 한지가 좀 된 것 같은데 이제 이런 건 동하지도 않는다. 해준은 가차 없이 성준의 손을 치워내고 팔뚝이며 어깨를 찰싹찰싹 때렸다. 냄새 나니까 안 씻고 올 거면 너 나가서 자. 으으윽 낮게 비명을 지르며 성준이 주섬주섬 제 몸을 일으켰다. 옷을 벗어 던지고 욕실로 걸어 들어가는 커다란 뒷모습을 보며 해준은 그새 미약하게 오던 잠이 다 달아난 것을 느꼈다. 어느덧 시계는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더라. 해준은 가만히 누워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과거의 서로를 회상했다. 먼저 좋아한 지는 사실 꽤 오래되었다. 그 오랫동안을 한 사람만 마음에 품으면서도 차마 제 외사랑을 고백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어차피 절대 안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몇 년이 흘러도 마음이 변하지가 않으니 뭔가 좀 억울해졌다. 어차피 안 될 거지만, 너무 좋아하니까 한 번쯤은 말을 해야 덜 억울하겠다 싶어서 지나가듯 말했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었고 해가 막 넘어가서 하늘이 새파랬던 옥상이었다. 



‘하성준 니가 좋아 죽을 것 같다.’ 



무표정하고 덤덤한 목소리로 이뤄지는 고백이었다. 뭐? 하고 되묻는 소리에 해준은 됐다, 하면서 먼저 성준을 스쳐 지나갔다. 말이라도 해봤으니 되었다고 그냥 그 사실에 만족하려 했지만 성준을 지나치자마자 일그러지는 표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도망치듯 옥상을 빠져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손이 덜덜 떨려와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느리게 올라오는 층수를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 뒤따라 나온 성준이 제 몸을 돌려세웠다. 야, 넌 무슨 농담을 그렇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맞닥트린 얼굴이 처참했다.



‘너 얼굴이 왜 이러는데?’

‘아무 것도 아냐.’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잖아.’

‘그냥 신경 쓰지 마.’



아 쫌! 버럭 성질을 내는 성준을 뒤로 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닫힘 버튼을 눌렀다. 넌 있다가 내려와. 하는 말에 당연히 고분고분하지 않은 성준이 닫히는 문을 제 손으로 잡아챘다. 다시 문이 열리고 마주하는 얼굴에 이번에는 해준이 눈을 질끈 감았다.



‘너 똑바로 얘기해라. 방금 한 말 무슨 소리인지.’

‘......’

‘또 입 다물어서 사람 속 터지게 하지 말고.’



그 때 그 형형한 표정만 기억해보자면 마치 넌 금방이라도 안으로 뛰어들어와 나를 몇 대는 칠 것 같았다고 말했더니, 하성준은 그 충격 고백 이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가 입을 다물었던 그 며칠 내내 영문도 모르고 속이 터지고 이게 뭘 잘못 쳐먹었나 싶어 진짜 답답해 죽을 뻔 했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그래서, 지금 왜 이렇게 됐더라? 참 먼 길을 굽이굽이 돌아와 연애다운 연애를 시작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났던 게 장장 5년, 같이 살 붙이고 산 게 이제 2년 남짓. 짝사랑한 시간까지 합치면 근 10년을 하성준이라는 한 남자에 매여있는 거였다. 해준은 물론 아직도 죽을 만큼 성준이 좋았다. 그게 좋아하는 티가 안 나서 그렇지. 뭐 그런 걸 꼭 표현을 해야 아는 걸까, 이제는 굳이. 해준에겐 아직도 사랑이라는 단어가 낯간지럽고 어색했지만 제 인생에서 그 말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을 뽑으라면 그건 꼭 하성준이어야 했다. 딱 그만큼이었다.







젖은 머리를 채 말리지도 않고 몸에 물칠만 하고 옆으로 기어들어온 성준이 평소 잠버릇대로 몸을 동그랗게 만 채로 벽을 보고 모로 누운 해준의 등 뒤로 바짝 붙어왔다. 익숙하게 제 한 팔을 옆구리 사이로 끼워 넣어 허리를 끌어안는 손길. 그리고 뒷목에 이마를 대었는지 성준의 젖은 앞머리가, 숨결이 축축하게 닿아왔다. 해준아, 자? 티셔츠 안으로 들어온 뜨거운 손이 마른 배를 문지르더니 자기 편한 자세를 잡는다. 하여튼 별 이상한 습관이었다. 몇 년 째 이렇게 뒤에 딱 붙어서는 제 배를 만지작거리면서 자는 성준을 이제는 해준도 포기했다. 머리 말리고 자라고, 베개 다 젖는다고 잔소리를 해야 할 텐데, 나 오늘 진짜 힘들었어. 라고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그 말이 채 나오지 않았다. 다만 해준은 제 배 위에 얹어진 성준의 손등 위로 가만히 제 왼손을 포개었을 뿐이다. 잘 자. 내일 봐. 느릿하게 말하며 뒷목에 입술을 몇 번 쪽쪽거리던 성준이 머지않아 깊게 잠들었는지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 사랑이 어떻게 왔는지 모르는 것처럼 언제고 이렇게 떠나갈 수 있겠지. 다만 그 때가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좋겠다고, 해준은 맞닿은 등 뒤로 성준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것을 느끼며 저도 느릿하게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