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율백기] 배드 로맨스

 

 

 

 

 

 

 

 

석율이 15층 탕비실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보였던 것은 누군가의 축 쳐진 어깨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긴 한숨 소리. 셔츠 핏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날개 뼈가 푹 꺼질 정도로 등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 굳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석율은 그 뒷모습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장백기는, 저 넓은 등이 지독하게 외로워 보인다는 것을 본인만 모르는 게 분명하다. 어떡하지. 다가가서 안아주고 싶은데. 하지만 난 그럴 자격도 없으니까. 한참을 마음의 욕망과 싸우느라 평소답지 않게 소리를 죽이고 있던 석율은 결국 이쯤에서 헛기침 소리를 냈다. 백기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다 그런 석율을 눈치채고는 안도했다. 왜, 혹시 기다리던 사람이라도 있었던 거야? 라고 물어보려다가 영 악취미 같아서, 석율은 그냥 평소처럼 웃어버렸다. 백기씨, 여기 있었네! 일부러 반가운 목소리로 말을 걸면서 옆으로 바짝 다가서자 백기는 한 걸음 더 물러섰다. 우리 사이라는 게 딱 이 만큼의 거리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게 못내 서운할 때가 있다. 나 상처받게 그러지 마. 안 잡아 먹어. 커피 믹스를 흔들며 내뱉는 석율의 진담 섞인 농담에 백기는 뭔가 곤란한 듯, 한참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하다가 입을 달싹였다.


“저기, 한석율씨.”
“뭐, 말해. 다 말해.”
“저랑… 술 한 잔 하실래요?”


뭐? 막 뜯은 커피믹스가 종이컵이 아닌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석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백기를 쳐다보았다. 처음이었다. 늘 자신이 먼저 술 한잔 하자, 커피 한잔 하자 떼를 써도 백기는 한 번도 제 말에 그러마 하고 고분고분하게 대답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저, 됐습니다. 실수인 듯 말을 무르려 드는 백기의 팔에 석율이 다급하게 팔짱을 꼈다. 후, 백기씨.


“지금까지 본 백기씨 모습 중에 오늘이 제일 맘에 드네.”
“아… 네?”


그럼 있다 퇴근하고 봐! 석율은 약간 굳어있는 백기에게 찡긋 윙크를 하고서 먼저 탕비실을 나섰다. 커피를 마시려던 원래의 목적은 상실한 채였지만 의외의 소득이 있었다. 이건 기회야, 한석율. 그럼 내게 온 기회는? 잡아야지. 석율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16층의 싸이코패스도 두렵지 않았다. 정시 퇴근의 목표를 두고 석율은 남은 업무의 우선순위를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분주하게 걸음을 옮겼다.












Bad Romance
한석율X장백기X강해준












석율이 백기를 데리고 온 곳은 적당한 분위기의 술집이었다. 남자 둘이서 오기에도 영 껄끄럽진 않고 시끄럽지 않아서, 무엇보다 회사에서 약간의 거리가 있는 곳이라 제격이었다. 뭐 마실래? 에 아무거나, 라고 답하는 백기에게 석율은 익숙하게 주문을 하고서 가장 먼저 백기의 앞에 놓인 빈 잔에 술부터 채워주었다. 영 어색한지 계속 급하게 술을 들이키는 백기와 그런 백기를 보며 시덥잖은 얘기만 건네던 석율은 사실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정작 중요한 얘기는 안 나오고 헛돌던 말들은 백기가 제법 술에 취하자 그것마저 뚝 멈춰버렸다. 대화 내내 어두운 표정이던 백기는 안경을 벗고 손바닥으로 열이 오른 시큰한 얼굴을 쓸어냈다. 알코올 기운에 잔뜩 상처받은 표정이 그제서야 드러났다. 석율의 손 안에서 내내 굴러다니던 팝콘이 부스러졌다.


“힘들지?”
“……”
“너 힘들어서 이러는 거잖아, 지금.”
“한석율씨.”
“어디에다 말 할 데도 없고. 속은 괴로워 죽을 지경이고.”


안 그래? 석율에 말에 백기는 울듯이 웃었다. 말하자면, 석율은 장백기의 짝사랑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의 길고 지고지순한 짝사랑은 분명한 거절을 당했음에도 끝날 줄을 모르고 백기를 좀먹고 있었다. 안 되는 걸 아는데도… 멈춰지지가 않아요. 백기는 울음기가 그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람 마음이란 게, 종이 접듯 한 순간에 접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자꾸 접으래. 이제 그만 하래. 그 푸념에 석율은 아무 말도 못했다. 마치 자신한테 하는 소리 같아서였다. 힘들어. 그거 힘들지. 내가 잘 알아. 나도 널 좋아하니까. 차마 말로 하지는 못하고 석율은 의자를 끌어다 백기의 옆으로 붙어 앉아서는 어깨만 토닥거렸다. 따뜻한 손길에 백기의 어깨가 작게 들썩였다. 다른 사람을 사랑함에 잔뜩 지쳐서 생긴 그 약한 틈을, 석율은 할 수만 있다면 더 벌려내고 기꺼이 안으로 파고들고 싶었다. 이러는 게 나쁜 건가 싶으면서도 역시 좋아하는 마음을 멈출 수는 없었으니까. 약간의 기대와 함께 용기를 내어 백기를 품으로 끌어 안자 백기는 취기에 젖어 얌전히 안겨왔다. 부드럽게 등을 쓸어내는 손길에 백기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힘들면 얘기해. 나한테 기대도 돼.”
“……”
“나 그 정도는 하게 해주라.”


조금 더 욕심 낸 석율의 말에 이번엔 백기가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이라는 말은 석율의 표정을 보자마자 그대로 입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석율의 눈빛은 자신과 꼭 닮아있었다. 그렇기에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그게 자신을 향한 어떤 종류의 마음인지 알 수 있었다. 상처받은 눈빛을 하고서도 석율은 여느 때처럼 씩 웃으며 말했다. 백기씨, 나 진짜 괜찮아. 나 이용해도 돼. 석율의 말에 백기가 인상을 찌뿌렸다.


“저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닙니다.”
“알아, 나쁜 건 내가 다 할 테니까.”


너는 그냥 기회만 줘. 그걸로 충분해. 석율에 말에 백기는 도리질을 쳤다. 이 이상 악순환의 연결고리를 만들고 싶진 않았다. 백기는 석율을 밀어내고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가야겠어요. 급하게 가방과 외투를 집어 드는 손을 이번엔 석율이 잡았다. 데려다 줄게. 백기는 제 손을 감싸 안은 석율의 단단한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대로 한참을 잡혀있었다. 술기운이고 뭐고, 그 손을 뿌리쳐야 했는데. 백기는 뒤늦게 그 순간을 후회했다. 자신과 꼭 닮아있던 석율을 모질게 거절하지 못했던 자신을.










*










“장백기씨. 가져가요. 수정할 부분은 메모로 붙여두었습니다.”
“네, 대리님.”


백기는 이제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않는 제 사수의 차가운 목소리를 들었다. 업무상의 것들을 제외하고는 해준은 백기에게 어떤 사적인 영역도 허락하지 않았다. 내내 최악이긴 했지만 정확히는 그 고백 이후였다. 미쳤지. 어쩌자고.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던 성급한 고백은 그나마 남아있던 얄팍한 온정마저 빼앗아갔다. 장백기씨. 못 들은 걸로 할 테니까. 여기서 그만하죠. 해준의 말을 회상하며 백기는 시려오는 손끝을 마주잡았다. 재고의 여지 따윈 없다는 듯한 칼 같은 대답은 아주 잠깐이나마 부풀었던 기대를 모두 빼앗아버렸다.


매일 얼굴을 마주보면서도 또 매일 철저하게 내쳐지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당신 말대로, 모든 걸 단칼에 끊어낼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그게 내 맘대로 안 되는 건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백기는 해준에게 묻고 싶었다. 그의 명쾌한 답변을 바랬다. 하지만 몇 번을 되물어도 답은 없었다. 백기에게 해준은 잡히지 않는 모래와도 같은 사람이었다. 애초에 저 사람을 욕심내면 안 되는 거였다고, 가지지 못할 사람이었다고. 그 사실을 머리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상처를 받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견딜 수가 없어서… 그런 밤이면 백기는 석율을 불렀다. 그의 말대로 자신은 그를 이용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사람이란 이리도 잔인해서.








─ 취했어?
“…아니요.”
─ 데리러 갈까?


거기 어딘데, 지금 갈게. 따뜻한 목소리에 마음이 풀어져서는 또 후회할 일을 되풀이하곤 하는 것이다. 백기는 석율의 뜨거운 체온이 좋았다. 가끔 잔뜩 취한 자신을 데리러 온 석율에게 손이 잡히고, 모르는 척 그의 품에 안길 때면 백기는 그 체온 안에서 다른 사람을 상상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이 너무 쓰레기 같아서, 백기는 석율의 품에서 몇 번 울기도 했었다. 그럴 때면 석율은 모르는 척 백기의 눈물을 닦아주고 눈가에 가만히 입을 맞춰주며 끊임 없이 같은 말을 속삭였다. 쉬이, 괜찮아. 나한텐 다 괜찮아. 그러면서도,


“내가 잘 해줄게. 그냥 나한테 오면 안될까?”


가끔 제 진심을 덜컥 드러내놓곤 했다. 백기는 다음날이면 숙취에 절어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듯 석율에게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 말에 석율은 잠깐 말을 잊다가 체념하듯 웃었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어. 분명히 지쳐가는 얼굴로 그렇게.










*










이젠 더 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백기는 석율을 불러내었다. 언제나 제 부름엔 한걸음에 달려오던 석율은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찬바람이 부는 옥상에 마주 서서 백기는 석율의 웃는 얼굴을 한참이나 마주 보았다. 왜 그래. 나 긴장되게. 이어지는 백기의 침묵에 석율의 표정은 점점 딱딱해졌다. 후우, 길게 뱉는 숨으로 하얀 입김이 쏟아졌다. 나 잠깐, 담배 좀. 석율이 불을 붙이는 동안 백기는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했다. 어차피 뭐라고 둘러대도 그게 다 핑계일 것을 알아서, 백기는 차라리 솔직하게 얘기했다.


“이제 그만해요.”
“뭐를?”


장백기씨. 여기서 그만하죠. 해준과 똑같은 말을 자신이 석율에게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당신에게 더 이상 진창처럼 구는 거, 그만할래요. 상처 주고 상처 받는 건 이제 지겹고, 당신의 생채기 난 얼굴을 보는 것도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끔찍하니까. 백기의 말에 석율이 한숨을 쉬듯 나직하게 웃었다. 숨 사이로 담배 연기가 뿌옇게 번졌다. 뭘 그만해. 애초에 우리는 뭘 시작조차 한 적이 없는데.


“먼저 부른 건 너였잖아.”
“내가… 잘못했어요.”
“백기씨, 나 이용해도 된다니까?”


외로운 사람들끼리 그 정돈 할 수 있는 거잖아. 나는 니가 필요하고, 너도 내가 필요하고. 니가 나를 이용하고, 나는 그런 너를 기다리고. 뭐 서로 돕고 살자는 거지. 석율의 말투는 한없이 가벼웠으나 그 무게만은 그렇지 않았다. 마음속에 무거운 추가 겹겹이 얹어진 기분이었다. 백기는 진심으로 석율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워졌다. 석율이 어떤 마음으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도 알 것 같아서였다. 당신은 정말로 나를 좋아하니까.


“내가 다시 찾아가도, 나 받아주지 말아요.”
“그래서 다시 찾아올 생각은 있고?”
“…아니요.”


단단한 척 해도 그 속은 무르다는 걸 알고 있다. 이미 여러 번의 칼질로 너덜너덜해진 표피는 그 속을 너무 쉽게 보여주곤 했으니까. 석율은 백기의 차게 식은 얼굴에 제 손바닥을 감쌌다. 그리고 천천히 쓸었다. 이렇게 부드럽고 약하면서, 자꾸 혼자 울려고 해. 왜, 너는. 백기는 그런 석율의 손길에 늘 그래왔듯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렇게도 익숙하다는 걸 서로만 몰랐다. 가만히 품을 열고 있으면, 언젠가는 상처에 찌들고 애정에 굶주린 니가 날 찾아오는 날도 있겠지.


“니가 오면, 나는 언제고 다 받아줄 거야.”
“……”
“대신, 니 발로 오면 그땐 진짜로 안 놔줘.”


나는 그냥 기다릴 거야. 니가 올 때까지.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거기에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따뜻했던 체온이 사라지고 나서야 백기는 석율의 빈 자리를 알았다. 두 사람이 빠져나간 마음이 허전했다.










*










서울로 돌아가는 길은 길었다. 라디오도 켜지 않은 차 안은 정적만이 가득했다. 백기는 침묵에 목이 졸리는 듯한 기분을 난생 처음으로 느꼈다. 해준과 당일로 출장을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잘 수도 없어서 조수석에서 내내 뻣뻣한 자세로 앉아있는 백기를 해준이 힐끔거렸다. 그렇게 티 내지 않아도 다 알겠다만, 백기는 내내 긴장을 해서인지 피로한 눈치였다. 업무 때문이라기보단 아마 옆에 있는 자신을 의식해서 더 그럴 거라고 해준은 생각했다.


“힘들어요?”
“네? 아닙니다.”
“다 괜찮아집니다. 나도 그랬습니다.”


어떤 게 힘드냐고 물었던 건지, 해준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알았다. 내내 견고한 얼음 벽을 세우던 제 사수는 여전히 쌀쌀맞은 얼굴이었으나 그 짧은 문장은 이해를 담고 있었다. 나도 당신과 같은 시절이 있었노라고. 견디다 보면 그런 건 다 괜찮아진다고. 없었던 일로 하자고 거절한 이후로 해준과는 한 번도 이 문제에 대해서 얘기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제 마음을 다 무시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백기는 핸들을 부드럽게 돌리는 해준의 옆모습을 보았다. 언제 봐도 단정하고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모습에 늘 마음이 떨렸고 그를 닮고 싶었다. 어쩌면 이런 상황에서도 한결 같아서… 백기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도 아직은, 많이 힘듭니다. 대리님은 어떻게 견디셨어요? 숨이 잔뜩 죽은 부사수의 모습을 보며 해준은 생각했다. 아직, 멀었네.


“애초에 마음이 없는 상대에게 여지를 주는 게 더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차갑게 굴었던 건 미안합니다.”
“지금 제게 이런 얘기를 하시는 이유는 뭡니까.”
“빨리 정리하라고요. 남은 미련 없이.”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니까. 확실하게 한 번 더 차이고, 남은 미련도 탈탈 털렸다. 그게 해준이 말한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공적인 관계에 사적인 감정이 끼어드는 건 더더욱 싫다고 해준이 못을 박았기 때문에 백기는 이후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서울 도심의 비교적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백기는 해준에게 여기서 차를 세워달라고 부탁했다. 해준은 별 말 없이 백기를 내려주고는 잘 들어가라는 인사와 함께 담백하게 떠나갔다.








이렇게 지난한 짝사랑이… 끝나버릴 줄이야. 백기는 낯선 표지판이 가득한 거리에 서 있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어디로 가야 할 지를 모르겠다. 발길은 갈 곳을 잃었다. 시야는 뿌옇고 어지럽고 토할 것만 같은 멀미가 한번에 밀려왔다. 내내 휘청거리기만 했었지, 내 사랑은. 해준의 앞에서 간신히 눌러 참았던 눈물은 그제서야 봇물처럼 터져 나와 마른 얼굴을 적셨다. 이렇게 힘들 때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는데. 내가 견딜 수가 없어 부르면, 늘 달려와주던 사람이 있었는데. 백기는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더듬다가 그대로 꾹 쥐었다. 애초에 마음이 없는 상대에게 여지를 주는 게 더 나쁘다고 말하는 해준의 목소리와 나를 니 마음껏 이용해보라는 석율의 목소리가 한데 섞여 머릿속을 윙윙 울렸다. 나쁜 사람이고 싶진 않았다고요. 그냥 나는, 사랑하고 사랑 받고 싶었을 뿐인데. 백기는 힘없이 웃었다. 머리 위로 차가운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고 있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백기는 그냥 앞을 향해 걸었다. 얌전했던 빗발이 거세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










석율은 소파에 길게 누운 몸을 뒤척였다. 틀어놓은 영화는 영 재미가 없어서 반쯤을 보다 말다 했다. 내내 손 안에 쥔 핸드폰은 기다리는 사람 생각은 안 하는지 미동도 없었다. 올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으니, 석율은 백기에게 먼저 연락이 오지 않으면 그를 일부러 찾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주일이 넘도록 정말로 연락이 뚝 끊긴 것을 보니 결국 여기까지인 건가 싶기도 했다. 사실 기대를 하지 않는다면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석율도 사람이었고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옆에서 부대끼다 보면 뭐 언젠가 백기가 제게 온전히 넘어오는 날도 있지 않을까, 그간 그런 욕심 속에서 백기의 곁을 지켰던 게 사실이다. 그래도 힘들 때면 자신에게 기대어 오는 약한 모습에, 손이 닿는 거리에서 품에 안겨오면서도 마음만은 주지 않는 희망고문 속에서, 간신히 희망만을 쫓고 있었는데.


“나도 슬슬 지치나 봐, 장백기.”


다 포기할까? 아니면 더 흔들어볼까? 흔들면… 흔들리기는 할까. 며칠 내내 그런 고민을 하면서 내내 백기를 기다렸다. 딱 한번만 더 다가오면 그 때는 놓치지 않을 거라고 했었다. 제 발로 찾아올 때까지 숨을 죽이며 기다렸다가 먹잇감을 사냥할 생각이었다. 온순한 토끼는 겁이 많아서 덫 주위를 빙빙 맴돌기만 했다. 결정적인 순간. 그래, 그게 필요한 거였는데. 석율은 티비를 끄고 깜깜한 어둠 속에서 눈을 깜박였다.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또 어디서 질질 울고 있는 건 아닌지 이 순간에도 걱정이 됐다. 나도 참 답이 없네. 석율은 애써 눈을 감고 느릿하게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수마가 덮치면 이 생각들도 다 잊겠지 싶어서.








희미하게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배회하던 석율은 그 순간 눈을 반짝 떴다. 단 한 번의 벨 소리 이후로 현관문 너머는 정적이었다. 언제부터 내리기 시작했는지 빗소리가 거세게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석율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차가운 바닥에 맨발을 내딛었다. 어쩐지 예감이…


“왔네.”
“……”


틀리지를 않네. 현관문을 반쯤 연 채로 석율은 벽에 삐딱하게 기대어 섰다. 경계선 너머로 불이 꺼진 복도에서는 온 몸이 푹 젖은 백기가 입술을 달달 떨고 서있었다. 이제 안 온다고, 받아주지 말라고 할 땐 언제고. 어디서 이런 꼴을 해가지고 또 사람 마음 약해지게. 석율은 못마땅하다는 듯 팔짱을 끼고 백기의 창백한 얼굴을 노려보았다. 한석율씨…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또 불쌍하리만큼 작고 가여웠으나, 석율은 이번만큼은 호락호락하게 받아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경고했던 게 있기도 했으니 약간의 확인이 필요했다.


“니 발로 오면 이번엔 진짜로 안 놔주겠다고 했는데, 나 내 맘대로 생각해도 돼?”
“……”
“나한테 올 준비 됐어?”


석율의 물음에도 백기는 입만 달싹였다. 아무 것도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미진하게 지속되다가 없었던 일이 된다면 그건 제 쪽에서 사양이다. 석율은 열었던 현관 문고리로 손을 얹었다. 니가 아직 아니라면, 더 기다릴 테니까 나중에 다시 와. 차가운 석율의 말에 백기가 젖은 손가락으로 석율의 소매를 잡았다. 늘 따뜻했으면서, 나는 지금 마음이 추워 죽을 것 같은데. 안아줬으면 좋겠는데. 얼음장 같은 손을 녹여달라는 듯 백기의 손가락이 석율의 손등에서 손목으로 서투르게 파고 들었다. 하, 석율은 피곤한 얼굴로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있잖아.


“백기씨, 줄 것처럼 하고 안 주면 그거 진짜 나쁜 사람이야.”
“……”
“나한테는 지금 백기씨가 제일 나빠, 알아?”


이미 비에 흠뻑 젖어있어 몰랐는데 백기는 아까부터 울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것처럼 애달픈 얼굴 위로 눈물 줄기가 줄줄이 흘러내렸다. 앙 다문 입술 새로 하얀 입김이 새었다. 손목을 감싼 손가락은 행여나 뿌리칠 새라 더 절박하게 쥐어왔다. 어디서 얼마나 대단한 상처를 받아왔길래 이러는 거야. 이러면 내가 기대하게 돼버린다니까. 그래도 부족해서, 석율이 다시 한 번 선택지를 주었다.


“들어올래? 아니면, 그냥 갈래.”
“……”
“장백기.”


필요… 해요. 띄엄띄엄 흘러나온 말에 석율이 백기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뭐라고 했어? 석율의 되묻는 말에 백기가 석율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다시 한 번 말했다.


“지금 나한텐, 당신이, 필요해요.”


지금이 바로 그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석율은 백기의 손목을 잡고 순식간에 안으로 끌어당겼다. 쾅- 하고 두 사람의 등 뒤로 현관문이 거칠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백기를 그대로 문에 밀어붙이고 손목을 쥔 손은 머리 위로 고정시킨 석율이 그대로 고개를 틀어 입술을 맞붙여왔다. 부드러웠던 손과는 다르게 키스는 한없이 격정적이어서 백기의 차게 식은 입술은 금세 석율의 입안에서 뜨겁게 녹아 내렸다. 눈물로 젖어있는 얼굴에선 짠맛과 함께 비릿한 비내음이 풍겼다. 석율이 되는대로 밀어붙이는 탓에 벽에 붙은 백기의 등이 몇 번이고 부딪혔다 떨어졌고, 질척하게 젖어 엉겨있는 셔츠 위로는 석율의 손길이 넘나들었다. 석율의 영역 안에 온전히 들어오고 보니 모든 게 너무 빠르고 급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잠깐, 잠깐만… 백기가 석율의 어깨를 간신히 밀어내자 안 돼, 안 놔줘, 라고 말하는 석율의 목소리가 절절 끓었다. 백기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석율이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백기를 놓칠 새라 잔뜩 끌어안았다. 백기가 품 안에 얌전히 안겨있었지만 석율은 불안했다. 이번에도 마음만은 주지 않는 희망고문이라면, 더 이상은 버티기가 힘들 것 같아서.


“도망가지마.”
“……”
“오래 참고 기다렸으니까 이제 어디 가면 안돼.”


투정을 부리는 어린 아이 같은 목소리였다. 백기는 팔을 들어 조심스럽게 석율의 어깨를 감쌌다. 아까보다 진정된 따뜻한 숨이 목을 간지럽혔다. 뜨끈한 무언가에 어깨가 젖어왔다. 사랑을 갈구하는 목소리도, 손짓도, 얼굴도 우린 모두 다 닮아있었다. 이젠 아무도 상처받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백기는 석율을 더 바짝 끌어안았다. 서로의 체온이 미지근하게 녹아 들고, 불안정함 속에서 위태로운 안정이 찾아왔다.













+

 

내내 찬 기운에 푹 젖어있었던 지라, 따뜻한 물에 갓 샤워를 마치고 나온 백기의 얼굴이며 온몸이 발갛게 익어있었다. 석율의 옷을 대충 빌려 입고 나오는데 채 말리지 못한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 수건. 다시 욕실로 들어가려는 백기를 석율이 잡아당겨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들어가기 전에도 통 놓아주지를 않더니… 그 새를 못 참고 또 달려드는 모습에 백기가 난감하게 웃었다. 나 도망 안 간다니까요. 백기의 말에도 석율은 젖은 머리카락이며 드러난 목과 하얀 어깨에 연신 입을 맞추며 놓아주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같은 냄새가 나서 행복하다고, 석율이 중얼거렸다. 그 말에 백기는 가슴 안쪽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 매일이 오늘 같았으면 좋겠다.”
“……”
“정말로, 진심으로.”


가졌는데도 불안하면, 그건 뭘 어떡해야 하지. 어디다 단단히 묶어놓고 꽁꽁 숨겨놓아서 나만 볼 수 있게 하면 이 마음이 좀 가시려나? 당치도 않은 생각이었다. 석율은 욕실에서 드라이기를 가져와 백기를 제 무릎 사이에 앉혔다. 분명히 알고 있다. 아직 모든 게 제 것은 아니라는 걸. 백기는 자신이 필요하다고 말했을 뿐,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장백기, 니 진심은 지금 어디 있어? 넌 지금이 행복하니? 라고 물으려다가,


“장백기. 사랑해.”


라고 제 마음만 말했다. 시끄러운 드라이기 소리에 아주 작았던 석율의 목소리는 묻혀졌다. 어차피 들으라고 한 얘기는 아니었다.


적당한 바람으로 솜씨 좋게 머리를 말려주는 석율의 손길을 느끼며 백기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따뜻하고, 뭔가 간질거리는 게 꿈 속 같아서 영 현실감이 없었다. 이를테면 석율은 제게 가장 안전한 피난처였다. 사랑의 상처가 유리조각처럼 밟혀 피투성이 맨발로 달려와 문을 두드리면, 석율은 언제나처럼 자신의 상처를 감싸 주고 치료해줬으며, 견뎌야 할 그 모든 것들을 말없이 받아주었다. 그럴 때면 힘들었던 시간들은 마음속 깊숙한 벽장 속에 봉인될 수 있었다. 지금의 이 편안함 속으로 도망쳐서 나는 그저 안도하면 되는 걸까.


이게 사랑이 아니어도, 사랑이라고 믿다 보면, 우리도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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