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준백기] 라임라이트

 

 

 

 

 

 

 

 

[지난 달 25일 개봉 후 2일까지 ‘숨’의 누적 관객동원수는 총 79만명이다. 영화 ‘숨’은 사랑, 배신, 애증이라는 감정으로 얽히고 설킨 세 남녀의 파멸을 향한 치정 멜로 영화로,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여주인공 희수와 그녀를 뒤흔들고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어린 제자 선우, 그리고 희수의 남편 동혁의 엇갈린 욕망을 다루며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다소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진짜 화제는 ‘숨’의 선우를 연기한 신예 아닌 신예 장백기의 발견이다. 싱그러운 마스크. 하지만 순진하면서도, 때론 도발적인 매력까지 풍기는 다층적인 캐릭터로 관객들의 눈을 한번에 사로잡았다. 스크린에 성공적인 데뷔를 마친 장백기, 차기 충무로 기대주의 스크린 행보가 기대된다.]


백기는 월간 영화잡지에 개재된 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짤막하게 언급된 기사 내용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도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백기는 제 볼을 다시 한번 세게 꼬집었다. 아팠다. 얼마 전 시사회다 뭐다, 한바탕 하긴 했지만 막상 실물을 보고 나니 이 모든 게 한 여름 밤의 꿈만 같아서, 지금의 상황이 영 얼떨떨하기만 한 것이다. 이십 대 중반이 되도록 백기는 무명의 연기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도 어려울 정도였고, 자신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들에겐 어설픈 손놀림으로 사인을 해주었다. 이렇다 할 기획사도 없이 여기저기를 전전했던 자신은 얼마 전 모 배우가 있는 큰 엔터테인먼트와 계약을 했고 소속사와 매니저라는 것도 생겼다. 그렇게 아등바등해도 도무지 풀리지가 않더니만, 역시 인생은 한방이구나. 백기는 쓰게 웃었다. 누가 뭐래도 자신은 강해준의 ‘신데렐라’가 된 것이다. 누더기 옷을 벗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어도 아직 마인드는 가난한 예전과 다름 없었으나, 속아도 좋으니 이 꿈결 속을 걸었으면 했다.


2시부터 C 잡지사랑 인터뷰 있는 거 알지? 지금 가면 길 좀 막힐 것 같은데. 밟아야겠네. 매니저의 말에 백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쌓아두었던 몇 개의 시나리오 중의 하나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통 읽히지가 않아 몇 글자 보지도 못하고 이내 내려놓았다. 자신의 세계가 너무 빠르게 돌아가고 있어서, 백기는 그 속도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어지럽고 자꾸만 현기증이 났다. 생각해보니 세계의 축은 오직 그 사람이었다. 백기는 밤새 고민하고 몇 번이나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다 전송했던, 보고 싶다는 말에 온 짤막한 답장을 여러 번 읽었다. 끝나면 데리러 갈게. 간결한 내용이 너무 해준과 똑같아서 웃음이 났다.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아? 하고 백미러로 자신을 보며 묻는 매니저에게 백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한번 터진 웃음은 계속 멈추지 않았다.












Limelight
강해준X장백기












“나이가 좀 있네요. 이렇다 할 필모도 없고.”
“…네.”
“아역 배우 생활 이후에 공백이 긴데, 아무래도 연기 변신하기가 좀 어렵지.”
“……”
“장백기씨. 우리는 신선한 마스크가 필요한데, 뭐 더 보여줄 거 있어요?”


짤막한 즉흥 연기를 마치고 인터뷰가 진행중이었다. 백기는 남주의 친구인 조연 A역의 오디션을 보고 있었다. 그다지 비중이 큰 역할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백기가 들고 있던 대본은 이미 땀에 젖어 축축했다.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하는 관계자들의 말들에 백기의 어깨가 자꾸 위축됐다. 이번에도 낙방하면 정말 연기를 접어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앞이 깜깜하고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약간의 패닉 상태가 찾아왔을 때, 문득 중앙에 앉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벗어봐요.”
“…네?”
“안경, 벗어보라고.”


중앙에 앉은 남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비교적 나이가 젊고 체격이 단단한데다 뭔가 분위기가 수려했다. 하마터면 출연하는 배우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 아쉽게도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리딩을 하고 인터뷰가 진행되는 내내 펜을 돌리며 자신의 서류만 쳐다보던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불쑥 말을 했을 때 백기는 그야말로 깜짝 놀랐다. 벗어…, 아, 안경. 시력이 나쁜 탓에 쓰고 왔던 뿔 테 안경을 내리자 분위기가 반전됐다. 하얗고 깨끗한 피부의 멀건 얼굴은 소년과 청년의 중간에 있는 것처럼 순수해 보였다. 하지만 쌍꺼풀이 없는 긴 눈매와 고집 있는 콧대, 적당히 볼륨 있는 입술이 이상하게 그만큼 퇴폐적인 매력이 있었다. 한 마디로, 묘한 마스크였다. 해준이 그런 백기를 뚫어져라 보았다. 그 날카로운 시선에 꿰뚫릴 것 같다고 백기는 잠깐 생각했다. 해준은 이내 대본에 뭔가를 적으며 다시 말했다.


“거기 대본에, 선우 대사도 다 외웠어요?”
“아, 네.”
“#42 첫 번째 줄부터. 한 번 읽어볼래요?”


다행히 암기력은 좋은 편이었다. 대본이 주어진 30분 동안 3페이지가 넘는 지문을 모두 외웠기 때문에 백기는 망설임이 없었다. 잠깐 감정선을 새로 잡고 고개를 드는 백기의 눈빛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받지 마요. 나 버리고 그 사람한테 가버릴 거잖아. 불안해… 정말 불안해 미치겠어! 어느새 선우가 된 백기의 눈도, 목소리도 죄다 축축했다. 어제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으면서. 다, 거짓말이었어요…? 백기는 괴롭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맺혀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매끄럽게 흘러내렸다. 아… 잠시간 오디션 장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뭐가 잘못됐나? 백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눈물을 닦고 쑥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해준은 그런 백기를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드디어 제 원석을 찾아낸 것이다.












크랭크인은 초겨울이었다. 정신차리고 보니 백기는 스무 살의 대학생 선우가 되어있었다. 여주인공 희수와 희수의 남편 동혁이 주연이었으나 그 두 사람을 동시에 흔드는 선우라는 역할의 비중은 결코 작지 않았다. 내가 이걸 해도 되나. 선우로 캐스팅이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뻤고 모든 게 꿈만 같았다. 하지만 내가 이걸 감당이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며칠이나 고민하며 잠을 설치기도 했다. 여러 번의 실패로 백기는 자존감이 많이 결여되어 있는 상태였고, 연기를 접을 생각까지 했었던 터라 이건 애초 생각했던 배역에 비해 너무 버거운 기회였다. 더군다나 영화의 감독은 이미 몇 편의 독립 영화로 이름을 알리다가, 바로 전 작품으로 상업적 성공을 이뤘을 뿐만 아니라 유명 국제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던 강해준이었다. 오디션 날, 제게 안경을 벗어보라고 했던 바로 그 남자였다. 30대 초반의 젊은 감독은 거침이 없었다.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멋대로 백기를 캐스팅했던 것이다. 당시 물망에 올랐던 모 유명 아이돌이나 몇몇 젊은 연기자들이 너나 나나 노렸던 자리였으니 말 다했다. 내가 다 망치면 어떡하지. 다시 대중에게 버림받게 되는 건 아닐까. 몇몇 기사들로 백기의 이름이 오르내리면서 그 심리적 압박이 절정에 달했을 때, 백기는 해준을 찾아갔다.


“감독님. 저 자신이 없어요.”
“이제 와서 무슨 소리입니까, 그게.”


제가, 잘 할 수 있을까요? 백기의 목소리는 불안함에 젖어 있었다. 이미 사전 리딩도, 매스컴의 노출도 다 끝난 상태였다. 지금에 와서 뭘 바꾸는 것도 가당치도 않겠다만. 해준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신이 어떤 대단한 기회를 잡은 건지 아냐고 말을 하려다가 참았다. 안 그래도 혼나는 어린애처럼 잔뜩 풀이 죽어있는 백기에겐 독이 될 것이다. 백기는 자신이 특별히 선택한 원석이다. 아직 가공되지 않았을 뿐이지 얼마든지 빛나게 해줄 자신이 해준에겐 있었다. 그리고 어린 애를 다루는 방법도 잘 알고 있었다.


“장백기씨. 난 내 선택에 후회 안 합니다. 당신을 본 순간, 내가 생각하고 바래왔던 선우가 내 눈 앞에 있었어.”


해준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굳건했고 자신감이 넘쳤다.


“잘 들어. 널 조금만 버리면,”
“……”
“난 다 줄 수 있어.”


니가 원하는 모든 걸. 성공도, 명예도 다 쥐어줄 거야. 너는 그냥 니 자존심, 불안감, 걱정, 주위 시선들 그런 거 다 버리고 나만 따라오면 돼.
내 뮤즈가 되어줘.


해준의 말은 달콤한 악마의 유혹과 같았다. 백기는 홀린 듯한 얼굴로 해준을 바라보았다. 내 뮤즈가 되어줘. 백기가 해준에게 더 가까이 다가섰다. 다시 한 번만… 말씀 해 주실래요? 아무 것도 모른다는 그 순진한 얼굴에서 해준은 진한 색기를 느꼈다. 어떡하지, 자꾸 욕심이 나네. 해준은 백기의 희게 질린 손을 잡았다. 백기의 손등으로 해준의 입술이 내려 앉았다. 내 뮤즈가 되어줘, 장백기.












영화 촬영도 어느새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그 사이 계절이 두 번이나 지나갔다. 백기는 저 쪽에서 촬영감독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해준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항상 느꼈던 거지만 감독을 하기엔 지나치게 잘 생겼다. 저 얼굴로 배우를 하지, 왜? 하는 의문이 들다가도 이번 영화의 시나리오를 몇 번이나 읽고, 그의 지난 필모그래피를 훑으면서 백기는 해준의 영화에 완전히 반해버렸다. 그의 영화는 사람을 홀리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그 본인 조차도. 백기는 해준을 생각할 때마다 손등이 따끔거렸다. 그 날의 기억을 도무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백기는 해준이 말하는 대로 자신을 내버리기로 했다. 지금의 백기는 장백기가 아니라 그냥 ‘선우’ 그 자체였다. 해준의 마음 속에서 나는 어떤 존재일까. 그냥, 장백기일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도 스쳐갔다. 다 욕심이었다.


“백기씨, 손에서 피 나는데?”
“아…”


희수 역을 맡은 여배우가 깜짝 놀라며 백기의 손을 가리켰다. 촬영 중간에 NG가 났다. 대역을 써도 된다고 했는데도 백기는 끝내 고집을 부렸다. 뭐든지 최선을 다 하고 싶었다. 손이 다 부르트고 까지도록 촬영이 없을 때 짬짬이 첼로를 연습하다 보니 손끝이 너덜거리다 못해 피가 비친 거였다.


“하여간 독해. 적당히 해. 몸 부서져라 하지 말고.”
“죄송합니다.”


촬영이 잠깐 중단되었다. 어차피 길어지고 있어 모두가 지치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잠깐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해준은 촬영장 뒤로 조용히 백기를 불러냈다. 손 줘봐. 등 뒤로 숨기고 있던 백기의 손을 해준이 잡아당겼다. 해준은 백기의 손바닥을 뒤집었다. 상처가 처참했다. 안 아파? 해준의 말에 백기는 아무렇지 않다는 것처럼 고개만 끄덕였다. 죄송해요, 감독님. 저 때문에. 뭐가 죄송하다는 건지, 그 말에 해준은 화부터 나서 백기의 턱을 쥐고 바닥으로 향해있는 고개를 끌어올렸다. 고개 숙이지 말고, 나 좀 봐. 잘못한 거 아니니까 아프면 아프다고 해. 미련하게 참지 말고. 차가운 해준의 말에 백기는 더 움츠러들었다. 너는 대체. 해준은 피가 맺혀있는 백기의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뜨겁고 축축한 해준의 입 안이 느껴져 백기의 눈가가 붉어졌다. 아, 감독님… 해준은 그런 백기를 보며 피를 쪽 빨아냈다. 누가 봐도 섹슈얼한 상황이었다. 해준의 입술이 천천히 손바닥을 타고 올라 손목에 안착했다. 안쪽으로 뭉근한 감촉이 와 닿았다. 흐으, 해준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백기의 얼굴을 유심히 보다가 그만 놓아주었다. 더 이상 욕심을 내면 도망갈 지도 모르니까 천천히. 촬영은 다른 씬부터 할 테니까, 급한 대로 약부터 발라요. 누군가 해준을 불러대는 소리에 해준은 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남은 백기는 한참을 그 자리에 넋을 놓고 서 있었다.












몇 개월의 포스트 프로덕션 기간이 끝나고 첫 언론 시사회가 개최됐다. 백기는 해준의 옆 자리에 앉아 자신이 나온 첫 번째 영화를 감상했다. 긴장감에 벌벌 떨리는 손을 느꼈는지 코트 밑자락으로 해준의 큰 손이 백기의 손을 가만히 잡아왔다. 보는 눈이 있을까 봐 놓으려고 했지만 더 세게 틀어 잡혔다. 백기는 포기하고 스크린에 시선을 돌렸다. 러닝 타임 내내 백기는 생각했다. 내가,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나? 내가 저렇게 생겼었나? 화면 속의 나오는 선우가 도무지 실제의 자신 같지 않아서 백기는 몽롱하게 화면을 보았다. 백기가 울고 웃는 장면들은 해준의 필터링을 거쳐 아주 처연하고, 치명적인데다 어딘가 매달려있는 듯한 위태로운 분위기가 났다. 선우가 희수 앞에서 울 것처럼 웃으면서 뛰어내리는 장면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숨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엔딩크레딧에는 선우가 연주하던 첼로곡이 흘러나왔다. 백기의 이제는 완전히 다 나아버린 손끝을 해준이 더듬었다.


박수갈채는 한참을 이어졌다. 상영 후 진행된 기자 간담회 자리에는 수많은 취재진들이 참석했고, 그들의 높은 관심을 엿볼 수 있었다. 이 중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건 그 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선우’ 역할을 맡은 신예 장백기의 등장이었다. 영화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들이 이어지는 동안 백기는 걱정한 것에 비해 무리 없이 성심 성의껏 제 몫의 답을 했다. 해준은 제일 좋은 장면 몇 가지를 뽑아달라는 질문에 ‘영화 속 선우와 희수가 서로에 대한 마음을 깨닫는 장면에서, 상투적인 시선처리나 묘사가 될 수 있었음에도 디렉션을 줄 수 없는 배우 고유의 것을 완벽히 소유했다. 이 장면은 소년과 성인의 아슬한 경계에 있던 선우에게 다른 세상이 열리는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좋았다’고 답했다. 해준의 말에 내내 긴장에 굳어있던 백기가 활짝 웃었다. 셔터가 연사 되는 소리가 들렸다.












시사회 뒤풀이 자리는 스탭, 배우들 모두가 참석해서 떠들썩했다. 기분이 좋았고 몇 번이고 주는 술에 건배를 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술이 약한 백기는 금세 취했다. 아무래도 안되겠어서 머리도 식힐 겸 백기가 비틀비틀 자리를 벗어났다. 입구 쪽이 아닌 후문에 딸린 문을 열고 나오는데 그곳에는 해준이 난간에 기대어 서있었다. 막 불을 붙였는지 해준의 입에는 담배가 물려있었고 백기는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갈까 하다가 그냥 계단에 걸터앉았다. 푸- 내쉬는 숨에 술 냄새가 진동했다.


“많이 취했나 봐.”
“네, 쪼금.”


백기가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털어댔다. 그런 백기를 보다가 해준은 피려던 담배를 눌러 끄고 백기의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백기의 눈이 흐릿하게 해준을 향했다. 기분이 좋은지 입가엔 연신 미소가 매달려 있는 채였다. 눈을 깜박깜박. 백기의 긴 속눈썹이 그늘을 만들었다. 해준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백기의 눈가를 제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해준의 손길에 백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가, 해준의 손 위에 제 손을 동그랗게 감쌌다. 한참을 서로의 손만 만지작거리다가 백기가 해준의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말했다.


“좋아합니다.”
“뭐를?”
“감독님…… 작품이요.”
“장백기씨는 아직도 솔직하지 못하네.”
“……”


난 치정도 좋아하는데. 해준의 장난인지 아닌지 모를 말에 백기가 입을 내밀었다. 치정은, 이제 싫어요. 영화 속에서 선우는 자살했다. 치열한 사랑에 못 견뎌 끝내 젊은 숨을 끊어내는 연기를 하는 동안, 감정에 몰입하는 내내 괴로워서 몇 번을 울었다. 촬영이 끝나도 백기의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다음 씬은 중단이 될 정도였다. 그냥 나는 행복한 사랑이 하고 싶을 뿐이라고, 오래 기다려왔던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는 이제 당신이 신겨줬으면 좋겠다는 말에 해준이 백기의 입술을 꼬집었다.


“사랑고백을 왜 그렇게 어렵게 해.”
“……”
“당신은 당신이 얼마나 매력적인 사람이지 모르지?”


해준은 백기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덧그렸다. 내 뮤즈. 오래 찾아왔던 내 보석. 해준의 목소리는 낮고 진중했다. 시선이 아주 느리게 마주쳤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백기는 두 손을 해준의 어깨 위에 얹고 목덜미를 쓸어 올렸다. 해준의 한쪽 손은 백기의 귀와 목 뒤쪽을 감싸왔다. 서로의 얼굴이 점점 가깝게 붙었다. 해준의 손가락이 백기의 아래턱을 쓸다가 서서히 각도를 틀었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바짝 다가왔다고 생각했을 때, 두 사람의 입술이 강하게 맞물렸다. 해준은 백기의 아랫입술을 제 입술로 가볍게 물어 당겼다가 뭉근하게 입술을 비벼왔다. 그것은 발화였다. 순식간에 불이 붙는 것처럼 온 몸이 뜨거워졌다. 백기는 해준의 머리카락에 제 손가락을 얽고선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혀가 입안에서 만나는 순간 격렬하게 마구 얽혔다. 행여 놓칠 새라 혀 끝을 따라가다가 혀를 뾰족하게 세워 입천장과 혀 아래를 둥글게 긁어주니 백기는 낮게 신음하며 더 매달렸다. 백기의 속눈썹이 파들파들 떨려와 해준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깊이를 모르는 동굴 속의 샘은 마셔도 마셔도 자꾸만 갈증이 나서 잠깐이라도 떨어지려고 하면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다시 입술을 붙이고 서로의 타액을 삼켜댔다. 마침내 호흡이 부족해져 머리가 하얗게 번질 무렵 해준이 입술을 떼어내고 백기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만히 기대었다. 취기가 한 순간에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완전히 지쳐버려서 백기는 숨만 색색 내쉬었다.


“키스신을 찍었으니, 다음엔 성인 멜로를 찍을까?”
“……”
“나랑 단 둘이서.”


해준은 백기의 늘어진 몸을 일으켰다. 제 허리를 감싼 해준의 팔에 백기는 거의 매달리다시피 해서 계단을 내려갔다. 걸음이 꼬일 때마다 해준은 백기를 더 꽉 끌어안았다. 안에서는 여전히 흥에 겨운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누군가의 만취한 노랫소리도 들려왔다. 어쩌면 우리를 애타게 찾고 있을지도 몰랐으나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둘만의 파티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데리러 온다고 하더니 진짜로 왔네.


백기는 익숙한 해준의 차가 들어오는 것이 보이자 손을 흔들었다. 네이비색 코트에 회색 머플러를 칭칭 감은 백기는 눈만 빼꼼하게 보였다. 오늘의 마지막 스케줄은 화보 촬영이었다. 매니저는 먼저 보낸 지 오래였고 이미 자정이 넘어간 시간이라 스튜디오 근처에는 사람이 없었다. 해준의 작업실과 그리 멀지 않기 때문에 빨리 왔다고 해도 새벽의 추위는 무시할 수가 없었다. 세워진 차의 조수석을 열고 올라 탄 백기의 눈가가 불긋불긋했다.


“많이 기다렸어?”
“아뇨.”


거짓말. 해준은 따뜻한 손바닥으로 백기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백기가 얼굴 여기저기를 제 손바닥에 문대는 동안 해준은 백기의 목도리를 끌어내렸다. 습기가 차 젖어있는 코와 입술이 보였다. 언제 봐도 입술이 잘못했네. 해준은 참지 못하고 백기의 아랫입술을 물고 씹었다. 누가 보면 어떡해! 백기가 해준의 어깨를 밀어내고 다시 목도리를 코끝까지 단단히 여몄다.








백기는 처음 해준과 성인 멜로를 찍었던 그 날을 떠올렸다. 해준의 집에 들어가자 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들었다. 침대로 이동하는 내내 뭔가에 부딪히고 걸려서 넘어질 뻔 했는데도 끝까지 입술을 놓지 않았다. 백기는 미칠 듯한 기세의 해준이 무서웠지만 그런걸 신경쓰기에는 지금 제 몸을 어루만지는 야릇한 감각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약간의 조명만 켜진 침실에서 제 위에 올라타 있는 해준의 얼굴에 어스름하게 음영이 졌다. 그렇게 한 번 불이 붙은 머릿속의 폭죽은 굉음을 내며 끊임없이 터졌다.


불 같은 밤을 보내고 난 다음날 아침, 해준은 백기에게 제 큼직한 셔츠 하나만을 입혀놨다. 악취미가 따로 없었다. 불편한 자세로 침대에 앉아 끙끙거리는 백기는 해준이 타준 시리얼을 들고 있었다. 우유에 다 풀어져 흐물거리는 시리얼을 무미건조하게 씹고 있는 모습을 보던 해준이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진짜 변태라는 말에 해준은 귀여워 죽겠다는 듯 백기의 무릎을 깨물었었다. 그 사진은 아직도 해준의 핸드폰 속 어딘가에 남아있을 것이다.


히죽히죽, 무슨 생각을 하는지 혼자 웃고 있는 백기를 보며 운전대를 잡지 않은 손으로 해준이 백기의 왼손을 끌어다 깍지를 끼었다. 한층 농밀해진 스킨쉽에 해준은 거리낌이 없었다. 누가 볼까 두려우면서도 백기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해서 무서웠다. 속아도 좋으니 이 꿈결 속을 계속 같이 걸었으면… 백기는 깍지를 낀 해준의 손등을 제 쪽으로 끌었다. 어느 날 해준이 나의 뮤즈가 되어 달라는 말과 함께 마법처럼 입을 맞춘 것처럼, 해준의 손등에 제 입술을 꾸욱 찍었다. 해준은 그런 백기를 보더니 작게 한숨을 쉬었다. 뭐지? 나 또 뭐 잘못했나? 눈을 굴리며 눈치를 보는 백기를 보며 해준이 말했다.


“빨리 가자.”
“네?”
“못 참겠어.”


해준의 목소리가 절절 끓었다. 백기의 얼굴이 또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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