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준해준] 온 앤 오프

 

 

 

 

 

 

 

 

강해준. 그를 설명하는 말들은 주로 이렇게 정의되곤 한다. 매년 인센티브 1위에 빛나는 철강 1팀 에이스. 더하고 뺄 것도 없이 한 치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일 처리 능력의 소유자. 깔끔한 외모와 차분하고 젠틀한 성격. 그리고… 내 남자친구. 어감이 좀 이상한가. 어쨌든 평소 철야와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일중독자에 가까운 강해준의 애인은 자신이 맞았고 눈 앞에 있는 이 사람도 분명 강해준이 맞는데.


“뭐 할 말 있어?”
“어?”
“칼 들고 왜 그렇게 쳐다봐?”


해준은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준을 보았다가 들고 있던 사과를 씹었다. 아삭, 하고 듣기 좋은 소리가 난다. 성준은 지금 한 손에는 과도를, 나머지 손에는 반쯤 깎다 만 사과를 들고 있었다. 이 사과로 말하자면 제가 사다 준지 꽤 지난 게 냉장고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걸 간신히 구조한 것이다. 한 마디로 자신이 찾아내고 곱게 껍질을 깐 사과가 방금 강해준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는 소리다. 각 잡힌 정장만 입고 있던 평일과는 다르게 해준은 목이 다 늘어난 셔츠에 추리닝 바지를 입고 소파에 반쯤 드러누워있었다. 티비에서는 출연자들이 자기들만 아는 얘기로 즐겁게 떠들며 웃고 있는, 나른하고 평온한 토요일 오후 4시. 그러니까,


“너 진짜 강해준 맞냐?”
“응.”


알면서도 헷갈리는 것이다. 저게 내가 아는 강해준이 맞나 하고. 주말에도 집에서 노트북으로 일과 씨름할 거라 예상했던 강해준은 온데 간데 없고 죄다 풀어진 강해준만 남았다.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도 졸린 눈을 한 해준이 예쁘게 깎인 사과 하나를 제 입으로 들이민다. 됐지? 하는 귀찮은 표정마저도 예뻐 보여 성준이 혀를 끌끌 찼다. 미친놈. 그러면서도 제게 준 사과를 얌전히 입에 물며 성준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평일에는 완전 충전, 주말에는 완전 방전. 진짜 봐도 봐도 이건 적응이 안 된다고.












ON & OFF
하성준X강해준












좋아한다, 사귀자는 고백에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해준이 내밀었던 조건은 단 두 가지였다. 하나, 데이트는 무조건 주말에 할 것. 둘, 업무에 관해서는 사적인 것을 완전히 배제할 것. 평소 해준의 모습을 잘 알았기 때문에 성준은 바로 알아 들었다. 요지는 연애를 하는데 있어 일이 방해 받기 싫다는 것이었다. 공과 사가 확실한, 저 완벽한 모습에 반하기도 했던 터라 성준은 단번에 오케이를 했다. 그리고 그렇게 두 사람의 순탄한 연애가 시작되면 좋으련만.


“어디야?”
ㅡ 미안. 오늘은 도저히 안될 것 같은데.


첫 데이트 날부터 된통 꼬여버렸다. 오늘따라 신경 쓴다고 안 입던 코트도 꺼내 입고 면도도 깔끔하게 하고 머리도 정리하고, 약속시간보다 일찍 나가서 그렇게 해준을 기다렸는데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도무지 올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다. 약간 의아한 상태로 해준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이번엔 푹 잠겨서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너 어디 아파? 물었더니 그런 것 같아, 하는 밍숭맹숭한 대답이 들려왔다. 평일에 그렇게 혹사를 해대니, 여태 병이 안 나는 게 이상했지.


“그래서 어디야, 집?”
ㅡ …응.
“갈게. 기다려.”


첫 주말, 첫 데이튼데 이대로 보낼 수는 없어 오지 말라는 말도 무시하고 성준은 해준의 주소를 받아내고는 택시를 잡아 탔다. 더군다나 잘난 애인이 아프기까지 하다는데. 가는 길에 약도 사고 죽도 사고 과일도 사니 벌써 손이 한 짐이었다. 딱 자기 같은 깔끔한 원룸 건물에 도착해서 해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더니 진짜 다음주에 보면 안 될까? 하는 소리만 해대서 성준은 무대뽀로 현관문을 두드렸다. 열어. 집 열어. 소란에 마지못해 문을 연 해준의 볼이 홀쭉했다. 내 애인 얼굴 반쪽 됐네. 안쓰러운 마음으로 볼을 쓸었더니 해준이 포기한 듯 들어갈 수 있게 안으로 비켜섰다. 그리고 성준은 카오스를 보게 된다.


“약은 먹었어?”
“……”


안 먹었구나. 대답하기 뭐했는지 비척비척 동그란 이불더미로 들어간 해준을 두고 성준은 들고 있던 짐을 일단 식탁 위에 놓았다. 본의 아니게 남의 집 부엌 구경부터 하게 되는데, 싱크대는 물기 하나 없이 바짝 말라있고 냉장고에는 누가 갖다 놨는지 모를 다 시어빠진 김치 한 통이 있는 게 다였다. 그리고 맥주, 소주, 생수 같은 것들만 줄줄이 들어차 있는 게… 대체 뭘 먹고 살긴 하냐? 자취하는 집에 햇반이나 참치 통조림 같은 건 있어줘야 되는 거 아닌가? 남자 혼자 사는 집이 다 그렇다 쳐도, 같은 입장으로서도 해준의 집은 살풍경했다. 그러면서도 영 정리가 안되어있는 집안 꼴이… 아파서 그런 거겠지. 성준은 지레짐작한 후 팔을 걷어붙이고 팔자에도 없는 남의 집 청소부터 시작했다. 그냥 놔둬, 하는 해준의 말을 무시하고 한참 정리를 하고 들고 온 죽도 데워 먹이고 약까지 먹이고 나자 해준은 민망한지 고맙다는 말은 안 하고 이제 가도 된다고만 했다. 니 얼굴 보러 온 건데? 하며 열이 오른 얼굴을 큰 손으로 쓸자 성준의 손 위로 해준의 따끈한 손이 닿아왔다. 아파서 얌전하니까 그것도 뭐, 나름 귀엽네. 쓸데 없는 생각을 하다가 마른 입술에 쪽 입을 맞추자 이번엔 감기 옮는다고 질색을 하며 밀어낸다. 난 완전 건강해서 감기 안 옮아. 성준이 말했지만 결국 그 날은 쫓겨나다시피 나왔다. 밥 먹고 약 잘 챙겨 먹고. 잔소리까지 하고 나와서야 헷갈렸다. 이게 첫 데이트 맞는 건가? 사귀는 건 맞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집으로 가는 성준의 입가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해준은 월요일 아침에 말끔한 얼굴로 출근했다. 괜히 걱정이 돼서 기웃거렸더니 되려 무슨 일 있냐는 듯 쳐다봐서 성준은 그냥 씩 웃고 말았다. 아침부터 신나게 제 부사수를 절이고, 거래처에서 오는 전화를 받아 컨펌하고, 회의에 참석하는 쉴 틈 없는 스케줄 속에서도 해준은 평소대로 움직였다. 그 날 본 건 꿈이었나? 싶었다가 주말에 제가 줬던 감기약을 챙겨 먹는 걸 보니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










금요일엔 뭐 해? 사우나 가. 뭐? 난 원래 한 주의 마무리는 사우나에서 해. 니가 아저씨냐? 야, 그리고 요새는 금요일부터 주말인데 뭔 소리야. 성준이 전화로 틱틱거리는 것을 들으며 해준은 타이를 풀어 휙 던졌다. 이미 들어오면서부터 발치에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대충 밀고 들어온 해준이 냉장고를 열었다. 목요일 밤. 내내 이어지는 야근에 피곤이 쌓일 때로 쌓인 찌뿌둥한 몸은 일단 맥주 한 캔 마시고 자고 내일 사우나 갔다가 또 소주 한 병 마시고 자는 게 최고였다. 입사 후 내내 이 패턴을 하고 살았는데 이제 와서 데이트다 뭐다… 아 만나야 돼, 무조건 만나!! 저번 주에도 너 아파서 못 놀았잖아!!! 성준이 소리를 지르는 탓에 해준은 귀가 얼얼했다. 왜 데이트에 한 맺힌 사람처럼 굴어. 귀엽게. 그래도 금요일 밤은 어디나 사람이 많았고 사람 많은 데는 피곤해서 질색이라 이쯤에서 해준은 적당히 타협을 하기로 했다.


“그럼 그냥 우리 집 올래?”
ㅡ 어?
“나가기 귀찮아.”


흠, 너는 니 애인을 그렇게… 집에 막 불러도 되냐? 뭐래, 오기 싫음 마시던가. 시원하게 맥주 캔을 딴 해준은 마지못해 알았다는 대답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생각해보니 하성준 전에 마지막으로 사귀었던 사람과도 이런 문제로 헤어졌던 것 같다. 만나자고 보채고 그게 피곤하니 시들해지고 상대는 또 서운해서 잔뜩 쌓였던 게 결국 이별의 말로 터지는 수순.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는 막돼먹은 연애를 해왔지만 과연 얘는 얼마나 갈까… 그게 좀 궁금하기도 했다. 아직은 딱 그 정도였다. 일과 사랑, 사랑과 일. 그 중에 우선 순위를 정하자면 당연히 일이 먼저다. 벌써 비어버린 맥주 캔을 아쉽게 흔들다가 해준은 안 그렇게 생겨가지고 죽이며 약이며 바리바리 챙겨왔던 그 날의 성준을 떠올렸다. 정말 답지 않게 귀엽네, 곰 같이 생겨서.








약속대로 금요일 밤 해준의 집으로 쳐들어 온 성준은 저번이랑 별로 달라지지 않은 풍경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아파서 그런 게… 아니었나? 성준은 사우나에 갔다 왔다고 뽀얀 얼굴을 한 해준과 개판 오분 전인 실내를 번갈아 보았다. 인지부조화가 오고 있었다. 어쩐지… 저번 대리들 회식 때 해준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안돼. 더러워, 다. 그게 우리들이 아니라 자기네 집 얘기하는 걸지는 꿈에도 몰랐었다. 어디 소문 내도 누가 믿지도 않을 것 같아서 성준은 입 꼬리만 씰룩댔다. 저녁 먹었어? 하고 물으니 배고파? 배고프면 뭐 시켜 먹어, 하며 냉장고를 가리킨다. 저번엔 자세히 안 봐서 몰랐는데 한식, 일식, 중식까지 갖가지 전단지들이 빽빽하게 붙어 있었다. 싱크대가 마른 이유가 있구나. 그 정갈한 강해준이 혼자서 배달음식 시켜서 먹고 있을 걸 생각하니까 그게 왜 그렇게 웃긴지, 성준은 또 빵 터졌다. 그러지 말고 나가자. 성준은 소파 위에 널브러진 외투 중 하나를 해준에게 입히고 그대로 집을 나섰다. 춥다, 귀찮다 툴툴대면서도 또 성준이 이끄는 대로 따라온다.


결국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집 근처의 삼겹살집이었다. 삼겹살에 소주를 주문하면서 이게 또 매우 낭만적이지 못한 데이트라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랑 연애하면 원래 이러나? 아니면 얘만 이러나? 이래가지곤 김동식이랑 하는 거랑 다를 게 없는데. 또 생각만 하면서 성준은 익숙하게 소주를 따고 해준의 잔에 소주를 부었다. 해준도 성준의 잔을 채웠다. 짠-하고 경쾌한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목으로 알싸한 알코올이 넘어갔다. 치직치직 고기 익는 소리와 함께 성준이 열심히 고기를 뒤집는 동안 해준은 젓가락만 빨았다. 하여튼 골 때려.


“너 원래 이래, 아님 나한테만 이래?”
“둘 다.”
“어?”


잘 익은 고기를 앞에 놓아주자 이것저것 넣고 큼직하게 쌈을 싼다. 여전히 고기 굽느라 바쁜 성준의 입에 그 쌈을 밀어 넣으며 해준이 말했다. 주말에는 쉬어야 되는데 지금 너랑 데이트를 하고 있으니 나는 지금 할 만큼 하고 있다고. 거기다 쌈까지 싸줬잖아. 이런 거 아무한테나 안 해줘. 성준은 기가 차서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다가 입안의 쌈부터 씹었다. 마늘, 고추, 매운 것들이 잔뜩 들어가 눈물이 핑 돌았다.


“나 싫어서 이러는 거 아니지? 일부러 떼어내려고 정 떨어지게 한다던가.”
“내가 뭐 하러 그런 짓까지 하냐.”


귀찮게. 해준은 소주잔을 채우더니 자작을 한다. 야, 술만 마시지 말고 고기도 좀 먹어. 성준이 고기를 집어 입에 넣어주자 또 우물우물 씹는다. 먹기 싫은데 억지로 먹이는 것도 아니고 이건 진짜. 귀찮아. 피곤해. 힘들어. 이래가지고 평일에 일은 어떻게 하는지, 아주 상전이 따로 없었다. 졸라서 만나긴 했지만 어쨌든 얼굴을 보고 있으니 좋긴 했다. 같이 일하느라 매일 붙어있어도 보고 싶고 애틋하기도 한데, 정작 해준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모르겠어서 성준은 속이 탔다. 목이 말라 들이킨 소주가 벌써 4병을 넘어갈 때쯤 성준이 붉어진 얼굴로 물었다.


“야, 강해준. 너는 내가 니 애인이라는 자각은 있는 거지?”
“어.”
“나 좋아해?”
“난 싫은 건 안 해.”
“그럼 됐다.”


뭔가 묘하게 핀트가 어긋나긴 했지만 싫지 않으면 어쨌든 좋은거랬다. 성준은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해준도 취했는지 말꼬리가 점점 길게 늘어진다. 이쯤에서 계산을 하고 다시 해준의 집 앞으로 걸어가는 길에 성준은 해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부드러운 맛은 없는 단단한 몸이 품에 감겼다. 아 진짜, 나 얘 왜 좋아하는 거지? 사귀기 전부터 내내 고민하던 생각을 다시 하다가도 이런 모습을 자신만 볼 수 있다는 게 어쩌면 특권이라는 생각을 했다. 야, 넌 뭐 술버릇 같은 거 없냐? 애교 좀 부려봐. 미친 소리 하지 마. 말은 정 없게 하면서도 밀어내지 않는 게 좋아서, 깜깜한 골목 어귀에서 해준을 세운 성준이 다짜고짜 양 볼을 붙잡고 입을 맞춰 왔다. 그게 둘이서 하는 첫 키스였다. 얄팍한 입술 사이를 파고드는 두터운 혀에 해준은 눈을 감았다. 성준이 제멋대로 입안을 휘저으니 술기운이 한번에 덮쳐왔다. 잠깐, 잠깐만. 아쉬운 듯 입술을 떼는 성준에게선 아까 제가 싸줬던 쌈 속의 마늘 맛이 났다. 자업자득이라 해준은 별말 없이 입술만 훔쳤다. 자고 갈래? 대수롭지 않게 묻는 말에 성준은 고개만 저었다. 아무한테나 자고 가라고 하면 혼난다. 씁. 엄하게 말하며 손 인사와 함께 제게서 멀어지는 성준의 뒷모습을 보며 해준은 생각했다. 그렇다고 니가 아무나는 아니잖아.










*










남친이 너무 피곤해 합니다. 평일엔 바빠서 데이트 하기도 힘들다고 하고 주말까지 기다려 간신히 만나서는 남자친구 집에서만 놀아요. 전 같이 놀이공원도 가고 싶고 남산도 가고 싶고 남들 하는 데이트는 다 해보고 싶은데 남친은 귀찮고 힘들고 말로는 그냥 저랑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대요. 남친이 너무 좋긴 한데 가끔은 이게 사귀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듭니다. 절 정말로 좋아하긴 하는 걸까요? 요샌 정말 너무 서운하고 지치네요. 저 어떡하면 좋을까요?


뭐야, 누가 여기다 내 얘기를 적어놨어. 성준은 스크롤을 쭉 내렸다. 헤어지세요. 님만 힘듭니다. 베플에 추천이 이백 개가 넘었다. 댓글이 만선이었다. 그러다 뻥 차이고 후회한다. 안 봐도 훤하다. 이래서 여자는 자기를 더 좋아해주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분명 개똥차다. 혹시나 해서 계속 내려봐도 영 좋은 소리가 없었다. 보약이라도 지어주시고 같이 운동해보는 건 어때요? 하는 댓글 밑에 여자친구가 호구냐 봉이냐 하는 말들이 또 줄줄이 달려있었다. 보약 지어줘? 하고 물어봤자 그런 거 귀찮아서 안 먹어. 할 게 뻔한 해준의 얼굴을 떠올렸다. 말은 안 해도 성준은 조금씩 조급해지고 있었다. 가졌는데, 아직 뭔가 부족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해준과는 지지부진한 연애를 이어가고 있었다. 밀어내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당겨지지도 않고, 이러다가 진짜 비련의 주인공이 되는 것도 남 얘기는 아니었다. 성준은 해준의 무심한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좋고 싫고가 확실한 자신에 비하면 해준의 온도는 늘 미적지근했다. 아오, 나 왜 이러지. 성준은 머리를 쥐어뜯다가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쭉 뺐다. 해준의 단정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동글동글 야무진 고 머리통을 꽁꽁 때려주고 싶다가도 예쁘다고 어루만져주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모르겠다. 이건 그냥 내가 답이 없네. 성준은 한숨이 늘었다. 영이가 그런 성준을 흘끔거리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옥상문을 여는데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뒷모습만 봐도 누군지 잘 알아서 성준은 주위를 살피다가 조심스레 다가섰다. 쿡, 등을 찌르는 손길에 심심하게 돌아서는 해준의 얼굴이 영 까칠했다. 뭐가 잘 안 풀리나? 장백기가 뭔 사고라도 쳤나? 아니면 거래처에서 지랄이라도 한 건가. 피곤한 듯 잔뜩 인상을 쓴 얼굴을 쓸어줄까 하다가 그냥 손을 내렸다. 회사에서는 사적인 감정은 끼어들기 싫다는 해준의 말이 생각나서였다.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이고 성준이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가장해 물었다.


“뭔 일 있냐? 너 얼굴이 왜 그래.”
“그냥 좀.”


그냥 그런 게 뭔데, 물으려다가 성준은 그냥 해준의 어깨만 도닥였다. 뭐 니가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만 나한테 힘든 일이 뭔지 얘기해주면 더 좋겠다. 나 그래도 명색이 니 애인인데. 차마 말은 못하고 또 서운해지려는 맘을 누르고서 성준은 담배만 뻑뻑 피웠다. 살이 붙지 않은 고집스러운 턱을 보니 자꾸 입이 간지러웠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뭐, 내가 도와줄 거 있으면 얘기 해.”
“……”
“없음 말고.”


성준의 말에 뭔가 생각하는 듯 했던 해준이 말없이 피우던 담배를 비벼 껐다. 그리고 한걸음 다가오더니 성준의 어깨에 가만히 제 이마를 기대었다. 아… 뭐지? 이거 반칙인데. 당황해서 두 팔을 허공에 든 채로 얼어있던 성준이 조심스럽게 한 손으로 해준의 동그란 뒷통수를 감싸 안았다. 어색하고 투박한 손길로 제 머리를 쓸어 내리는 손길에 해준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잠깐만 이대로 있어. 그 말에 성준은 또 뒷목에 손을 얹은 채로 부동자세가 되었다. 얇은 드레스 셔츠 자락으로 해준의 숨이 느껴졌다. 왜 또 심장은 지랄발광을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성준은 허공을 보다가 바닥을 보다가 산만한 시선을 했다. 그러니까, 처음이었다. 늘 들이대고 조르기만 했지 막상 해준이 틈을 보이고 먼저 다가오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아… 어… 멍청한 소리만 내는 성준에게서 제 얼굴을 떼어낸 해준이 그런 성준을 보며 작게 웃었다.


“하성준. 고마워.”
“어?”


이런 나도 사랑해줘서. 하마터면 소리가 작아서 못 알아 들을 뻔 했다. 해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성준을 지나쳐 먼저 옥상을 빠져나갔다. 통화가 들어온 듯 블루투스를 만지는 손끝을 보며 성준은 목부터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앗! 뜨, 뜨! 여전히 한 손에 들고 있던 담배가 죄다 타 들어가는 줄도 몰랐었다. 성준은 급하게 손등을 털어냈다. 진정되지 않는 심장소리가 귓가에 이명처럼 들려왔다. 쿵. 쿵. 쿵. 꽤나 빠른 박자였다. 표현에 서투른 거였지 맘이 없는 건 아니었나 봐. 문득 며칠 전 읽었던 글이 오버랩 되었다. 당신의 남자친구는 사실 당신을 많이 사랑할지도 모릅니다. 남자친구를 믿어주세요. 근심이 싹 날아간 표정으로 성준은 사무실로 돌아왔다. 단순하기 짝이 없지만 남자는 원래 단순한 동물이랬다. 하대리님, 뭐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하는 유대리의 물음에도 성준은 그냥 실실 웃었다. 빨리 주말이 됐으면 좋겠다. 머릿속엔 그 생각만 가득했다.










*










며칠 내내 터진 일을 급하게 수습하다 보니 이번 주도 내내 야근이었다. 뭐 언제는 안 그랬냐만, 혼자서 죄다 끌어안고 완벽하게 처리하려는 이 성격도 병이라면 병일테다. 정시퇴근도 아닌데 그래도 사수보다 먼저 퇴근하기가 미안한 듯한 백기를 겨우 보내놓고, 두통약을 먹어도 듣지를 않아 지끈거리는 머리도 식힐 겸 탕비실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 퇴근을 안 한 건지 성준이 헛기침을 하고 주위를 살피더니 안으로 들어왔다. 뭘 또 그렇게 의식하고 그래, 심드렁한 얼굴을 한 해준에게 다가온 성준이 보이지 않게 입구에 등을 진 채로 서서 오른손을 덥썩 잡아왔다. 저보다 조금 작을 제 손가락을 조물거리는 것을 멀거니 보다가 해준이 나머지 손으로 성준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 잠깐 풀어줬다고 또 이러지.


“하지마. 회사야.”
“이게 사내연애의 묘미 아니겠냐?”


그리고 솔직히, 너도 저번에 나한테 반칙했잖아. 그게 뭐. 기억 안나. 뭐라고 떠들든 못들은 척 하며 해준은 갓 뽑아진 커피를 후후 불었다. 괜히 멋쩍어서 그러는 거 다 보인다. 이제 무표정한 얼굴 밑으로 감춰진 감정들을 몇 개는 읽을 수 있게 된 성준이 불쑥 말을 꺼냈다. 이번 주말에 영화 보러 갈래?


“영화?”
“응.”
“뭔데?”


해준은 성준이 제게 들이민 핸드폰으로 예매된 내역을 봤다. 요새 흥행한다는 박스오피스 몇 위, 뭐 그런 영화긴 했는데 문제는 시간이 자정을 넘어갔다. 황금 같은 주말에 그 사람 많은 데서 심야영화를 봐야 하나, 그냥 집에서 맥주나 마시면서 디비디나 보면 안될까, 까지 생각하다가 기대감에 찬 성준의 얼굴을 보니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성준으로서는 마음도 확인했겠다, 물론 혼자만의 생각일지 몰라도 제 나름대로는 욕심을 부린 일정이었다. 의외로 흔쾌히 수락하는 해준을 꽉 껴안았다 놓은 성준이 그럼 내가 그 날 데리러 갈게, 집 앞으로 나와. 하며 싱글벙글 웃었다. 이렇게 자꾸 끌고 다니다 보면 언젠가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하는 날도 오겠지. 아, 같이 낚시 가면 좋겠다. 텐트 치고 라면 끓여 먹고. 한 2년이나 지나야 이뤄질까 말까 한 헛된 꿈을 꾸는 성준의 표정이 밝았다. 같은 시간 해준의 머릿속에는 당장 자리로 돌아가자마자 처리해야 할 것들의 순번이 매겨지고 있었다. 일과 사랑, 사랑과 일. 이제는 두 가지를 모두 쟁취하려고 하니 몸은 더 바빠져야 했다.








시작할 때부터 불안하다 했더니. 이제는 차가 뒤집히고 총질이 난무하는 시끄러운 액션 씬에도 불구하고 해준은 고개를 숙이고 참 잘도 자고 있었다. 피곤한데 괜히 오자고 했나? 진짜 보약이라도 지어줘? 미안함 반, 야속함 반. 거기다 기대치에 비한 실망감 많이. 그러면서도 자세가 영 불편해 보여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주자 좀 더 편한 자세를 찾아 움직인다. 꼬물거리는 탓에 영화에 대한 집중도가 현저히 떨어진 성준은 툭 떨구어진 해준의 손을 잡아 제 손안에 쥐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그 어떤 소리보다 크게 들려와서 상영시간 내내 거기에만 집중해야 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쯤 가까스로 눈을 뜬 해준이 영화는 재밌었어? 하고 물었을 때, 너 때문에 뭔 내용인지를 하나도 모르겠다고 하는 대신 그저 그랬다고만 둘러댔다. 여전히 눈 밑이 검긴 했지만 조금 풀린 얼굴을 한 해준은 잠에서 덜 깼는지 무방비한 표정이었다. 아, 뽀뽀하고 싶다. 주위를 둘러보던 성준이 기습적으로 해준에게 입을 맞췄다 떼었다. 미친… 이러려고 일부러 심야영화 맨 뒷자리 예매한 건 아니겠지? 낯간지러워 해준은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극장을 나섰다. 야, 같이 가! 성준이 뒤에서 달려와 덮치듯 어깨동무를 해왔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내내 풀어 말어 실랑이를 하면서도 성준은 해준을 놓아주지 않았고 해준도 그런 성준을 완전히 밀어내진 않았다.


“집으로 가?”
“그럼 어디 가게.”


깜박거리는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벌써 두 시가 넘었다. 조수석에 앉아 연신 하품을 하는 해준을 보니 이 이상 뭘 하기에도 무리 같았다. 시간이 늦어 뻥 뚫린 도로는 막힘이 없었다. 확 바다로 가버려? 하는 객기를 부리기엔 청춘이 아니어서 성준은 얌전히 해준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나 진짜 말 잘 듣는다. 나 아니면 누가 이렇게 해. 금세 집 앞까지 다 와서도 뭔가 아쉬운 기색인 성준을 보며 해준이 그럼 맥주라도 마시고 갈래? 하고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라면 먹고 가라는 것도 아닌데, 한 두 번 와본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얼굴이 홧홧했다.


“싫어?”
“야. 강해준.”
“왜.”
“너 진짜 다른 사람 앞에선 이러면 절대 안 된다. 죽는다 진짜.”


뭘, 하고 묻기도 전에 안전벨트를 풀어낸 성준의 얼굴이 바짝 다가왔다. 몰라서 묻는 거 아니지? 대답 대신 졸음기 어린 눈이 느릿하게 깜박였다. 지금은 파워 오프까지 경계심 5% 남음. 영화 보는 내내 물고 빨고 싶었던 아랫입술을 깨물어 잇새로 당기자 입술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벌려진 입안으로 부드럽게 침입하며 해준의 어깨를 쥐고 끌어당겼다. 고분고분 딸려오는 몸을 이번에는 한 팔로 감싸 안고 등을 크게 쓸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입술끼리 질척이며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라디오도 켜지 않은 차 안에서 생생하게 들렸다. 아, 죽겠네. 성준은 해준의 턱과 목으로 이어지는 경계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아팠는지 아, 하는 낮은 신음과 함께 해준이 고개를 젖혔다. 목 안에서 울리는 소리에 성준이 뭔가를 간신히 참듯 주먹을 말아 쥐었다.


“해준아.”
“……”
“나 오늘, 자고 가도 돼?”


농담이었어도 늘 제가 던진 말엔 반응이 없더니, 오늘은 먼저 물어오는 목소리가 축축했다. 뭔가 침잠한 듯 가라앉아있는 성준의 눈을 보니 이번에야말로 백 퍼센트 진심이었다. 해준은 연신 자신의 몸을 쓸어 내리는 뜨거운 손을 느꼈다. 이미 타오르기 시작한 불을 꺼버리기엔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허락의 사인을 기다리는 성준의 눈에 진한 애정과 욕구가 넘실거렸다. 그게 너무 솔직하게 와 닿아서, 이젠 저도 도저히 못 참을 것 같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해준의 입이 벌어졌다.


“…그래.”


어디 한번 니 마음대로 해봐. 맞춰오는 진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될 대로 되라는 듯 해준은 웃었다. 성준의 이성 어딘가가 뚝 끊어졌다.
깜박깜박, 경고를 알리던 램프가 마침내 점멸했다. 













+

 

해준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 무력하게 누워있었다. 어느새 동이 터오는지 파랗게 날이 밝아오는 게 보였다. 아, 무슨 짓을 한 거지. 도발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근데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어쩔 수가 없잖아. 뭐 이제와 후회해 봤자 이미 다 벌어진 일이었다. 시동이 꺼지듯 체력이 방전이었다. 충전하려면 남은 주말은 한 발자국도 나가지 말고 진짜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강해준.”
“…잔다.”


말 시키지 말라고 대꾸하고 새벽 쌀쌀한 기운에 이불을 끌어당겼다. 그랬더니 성준이 딸려왔다. 이불 대신 뜨끈한 체온이 먼저 닿았다. 일부러 방향을 바꿔서 등을 돌려 누웠더니 이제는 단단하게 제 허리를 끌어안고선 한 몸처럼 바짝 붙었다. 여기 저기를 자꾸 감아오는걸 이제는 다 귀찮아져서 내버려뒀다. 그게 마음에 드는지 성준이 애처럼 웃었다. 뒷목에 성준이 내쉬는 고른 숨이 부딪히는 것이 느껴졌다. 간지럽다. 따뜻하기도 하고… 근데 너무 졸려.


“해준아.”
“……”
“사랑해.”
“어.”
“너도 나 좋은 거 맞지?”
“어.”
“그럼 나 얼마나 사랑해?”
“어.”
“어?”
“…어. 그러니까 제발 자.”


성준은 영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해준의 말에 웃음을 참았다. 발음이 죄다 늘어져서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게 너무 귀여워서 참고 참다가 눈 앞에 보이는 어깻죽지에 쪽쪽 입을 맞추고 앙앙 깨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해준은 자꾸 무겁게 내리 감겨오는 눈을 감았다. 간만에 심한 운동을 한데다 주중 내내 피로에 쩔어있던 몸은 이제 잠이 오다 못해 수마에 삼켜질 지경이었다. 정신이 없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해준은 계속 귀찮게 말을 걸어오는 성준에게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다음주엔 낚시 가자. 어. 약속. 잠 기운에 취해 해준이 뭣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 잠이 들었는지 축 늘어진 해준의 몸이 일정한 속도로 위 아래로 오르내렸다. 어쩌면 이렇게 하루 종일 품에 껴안고 있는 것도 괜찮은 데이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준은 해준의 목에 입술을 묻고 눈을 감았다. 이 정도면 제법 나쁘지만은 않은 연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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