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준준식] 프로포즈, 네버 다이

* Re:Born의 스핀오프 격이지만 전편을 안 읽어도 무방한 얘기

 

 

 

 

 

 

 

 

준식은 막 뽑아온 데이터를 책상 위로 길게 늘어놓았다. 듀얼 모니터 앞으로 놓인 전화기와 키보드 같은 것들을 제외하고, 책상 위는 서류더미와 잡동사니로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시장통이 연출되곤 했다. 어디 보자. 평소 깔끔떠는 성격과는 다르게 준식은 개의치 않고 귓가에 꽂고 있던 펜의 꼭지를 빼물고선 수치 결과를 대조했다. 숫자와 용어, 작은 텍스트와 표가 빼곡히 들어찬 것을 뚫어져라 보면서 준식은 습관적으로 오른쪽 구석으로 손을 뻗었다. 커피, 커피, 카페인… 곧 손에 잡히는 종이컵을 곧바로 입에 대자 다 식어 쓴맛 밖에 안 남은 미지근한 액체가 넘어왔다. 아, 맛 더럽게 없네 진짜. 야, 안영이!


“샘플 땄어?”
“아니요. 아직…”
“어제 분석 맡긴 건?”
“결과 나오면 바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빨리 빨리 좀 하자. 힘들어도 쫌만 더 바빠 봐. 네, 알겠습니다! 영이가 자료를 들고 부리나케 달려나갔다. ‘과학수사팀’이란 이름을 단 사무실은 거창한 이름과는 다르게 현재 준식과 영이가 전부였다. 그 외엔 각종 장비들과 모니터, 약품이 들어찬 찬장 같은 것들이 안 그래도 좁은 사무실을 꽉꽉 매우고 있었다. 얼마 전 출산을 이유로 근무했던 직원 하나가 어쩔 수 없이 장기 휴가를 냈다. 아무리 평소 급한 성격 탓에 일 미루는 건 죽어도 못하는 준식이나, 빠릿빠릿하고 일 처리 하나는 완벽하다는 수재 안영이였어도 손이 모자라니 몸이 바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요 며칠 큰 사건들이 빵빵 터져서 지금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철야에 쪽잠을 자다 보니 막상 손에 잡히는 건 커피나 담배 같은 것밖에 없었다. 오늘도 몇 잔 째인지 카운트도 안 되는데다, 안 그래도 카페인 중독이라고 누가 그렇게 잔소리를 하는데. 그래도. 아아, 준식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로 향했다. 마시고, 죽어보자. 각성 상태를 원하는 몸이 고장 난 것처럼 덜그럭거렸다. 구겨진 하얀 가운 안으로 비치는 종잇장처럼 낭창한 몸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Propose, Never Die
하성준X성준식












당이 떨어져서 도저히 안 되겠다. 커피 머신 앞에서 잠시 고민하던 준식은 아메리카노만 고집하던 평소와 다르게 믹스커피 쪽으로 손을 뻗었다. 마시면 뒷맛이 텁텁한데다 들쩍지근한 것도 싫었지만 지금은 뭐라도 상관없었다. 그 때였다. 준식이 막 봉지를 뜯으려고 하는데 뒤에서 불쑥 나타난 손이 제 허리를 감아왔다. 아, 씨발! 깜짝이야!


“야, 성준식. 너 어째 더 마른 거 같다?”
“이 곰 같은 새끼가 어디서 땀내 찔찔 흘리면서 들러붙고 지랄이야?”


준식에 말에도 아랑곳 않고 뒤로 바짝 붙은 성준이 가운 안으로 손을 넣어 준식의 납작한 배를 여기저기 더듬었다. 이상하다. 허리를 한 팔로 감아도 품이 남았다.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남자가 이렇게 허리가 부실해서 어따 쓸래? 어, 하긴 뭐. 쓸 데도 없긴 한데. 야 근데 제발 부탁이니까 살 좀 쪄라. 니 뼈에 찔려서 아파 죽겠다. 슬슬 약이 올라 준식은 성준의 팔을 매섭게 치워내고 돌아섰다. 성준은 막 트레이닝을 마치고 왔는지 운동복 차림에 앞머리가 땀에 젖어있는 채였다. 산만한 덩치를 하고 뭐 좋다고 실실 웃고 있는 얼굴을 보며 준식은 미간을 구겼다.


“안 그래도 피곤한데 시비 털지 마시고 갈 길 가시지.”
“너 또 커피 마시냐? 밥은?”
“됐어. 바빠. 생각 없어.”


툴툴거리는 준식의 얼굴을 성준은 유심히 보았다. 말만 바쁜 게 아니라서 눈 밑이 온통 거뭇거뭇했다. 제발 밥 좀 챙겨먹어라. 커피 그만 마셔라. 담배 좀 작작 피워라. 평소와 같이 온갖 잔소리를 하려다가 그 말을 쑥 집어넣고 성준이 준식의 눈가를 가만가만히 쓸었다. 안 그래도 불쌍하게 생겨가지고 살이 없어 폭 패인 볼이 영 안쓰러웠다. 진짜 기운이 없는 건지 성준의 터치에 준식은 별 반응 없이 눈만 깜박거렸다. 야, 성준식아. 우리 오랜만에 뽀뽀나 할까? 꺼져, 좀. 잠깐의 평화가 무색했다. 성준은 아랑곳 않고 작고 얇은 입술 위에 두툼한 제 입술을 꾹 눌렀다 떼었다. 아, 씨발. 땀냄새! 또 한껏 성질을 발사하려는 준식의 손에 성준이 들고 있던 비타민 음료를 쥐어줬다. 뚜껑도 따지 않은 새 거였다. 자꾸 커피 마시지 말고, 이거 마셔. 나 간다. 성준이 손을 흔들며 사라지자 준식은 손에 쥔 음료를 보았다. 밍밍하고 맛대가리도 없어서 싫은데. 투덜투덜하면서도 얌전히 커피를 다시 넣어놓고 준식은 음료의 뚜껑을 돌려 땄다.












연애 비슷한 걸 시작한지가 벌써 4년이 다 되간다. 성준과 준식은 해준과 동식을 비롯해 같은 기수로 들어온 동기였다. 처음 각자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 준식은 성준을, 성준은 준식을 보고는 서로 뭐 저런 게 다 있냐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만큼 둘은 아주 상극이다 못해서 인턴기간 내내 작은 일에도 사사건건 피 튀기며 싸워대기 일수였다. 성준은 준식 같은 타입의 남자사람을 처음 봤다. 예민하고, 까칠하고, 말투도 더럽고 성질도 급한데다 자존심도 무척 셌다. 성질 같아선 한대 치고 싶은데 그러면 어디 부러지기라도 할까봐 주먹만 들었다 내렸다 한 게 몇 번인지. 왜? 쳐. 쳐봐! 이 무식한 새끼야! 하고 준식이 성질을 살살 긁으면 성준은 가차없이 욕을 하면서도 참을성의 끝과 끝까지 인내하느라 이마에 힘줄이 다 돋았다.


준식의 입장에선 성준은 진짜 답도 없는 상마초 새끼였다. 남자들 사이에선 암암리에 서열이 확고했고, 성준은 여태껏 늘 그 꼭대기에서 살아왔을 타입이었다. 본인은 호탕하고 남자답다고 말하지만 섬세하지 못하고 알게 모르게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직설적인 말투가 정말 싫었다. 더군다나 준식은 자신의 왜소하고 깡마른 열악한 신체조건에 알게 모르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두 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성준이 더 의식됐다. 그냥, 존나, 싫다. 일 적인 문제가 아니면 상종하고 싶지 않다, 라는 바람대로 두 사람은 각각 경호팀과 과학수사팀으로 배치가 됐다. 층수는 같았지만 팀이 끝과 끝에 위치하고 있어 그나마 얼굴 볼 일이 적었다. 하지만 동기가 뭐라고 회사가 뭐라고 온갖 모임과 회의에 불려나가는데다, 이 일이야 워낙 밤낮이 없기 때문에 원하지 않아도 얼굴을 볼 기회는 많았다. 그 중에 최악의 최악은 서로의 숙소가 복도 구석에 짱 박혀 마주보고 있는 바로 앞방이라는 거였다.


“세면대 막혔는지 물이 안 내려가.”
“어쩌라고.”
“야, 근데 안에 샴푸랑 다 있냐?”
“이런 씨발.”


성준은 시도 때도 없이 준식을 귀찮게 했다. 뭐가 있냐 없냐부터 시작해 배고파 죽겠으니까 뭘 먹자, 이거 보자, 저거 하자 아주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거다. 일부러 저러는 걸까 싶었는데 성준은 원래가 무신경한 타입이었고 준식이 자길 싫어하든 말든 마이웨이였다. 귀찮은데, 바로 옆에 있으니까. 욕을 하고 성질을 내도 이제는 한 귀로 흘려 버리거나 그래, 알았어, 응, 하면서 준식을 자기 페이스로 말아먹었다. 성준이 준식의 방에 피자와 맥주를 들고 오거나, 코미디 영화를 보면서 낄낄대도 준식은 이제 그러려니 했다. 그렇게 붙어있으니 정이 안 들리가 없겠다만, 아주 나중에 성준은 얘기했다. 처음엔 반응이 재밌어 놀리는 재미였고 나중엔 니가 좋으니까 일부러 그랬던 거라고. 개새끼. 이 새끼는 수작 거는 방법부터 아주 틀려먹었던 거다.








그러던 중, 현장에 나갔던 성준이 한번 크게 다친 적이 있었다. 비공식적인 자리에 긴밀하게 참석하는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의 경호를 섰다가, 마치고 나오는 길에 괴한의 습격을 당했다. 수석에게 향하는 칼끝을 무식한 놈이 몸부터 달려들어서 막았는지 오른쪽 어깨와 가슴 근처에 크게 자상이 생겼다. 조금만 비켜갔으면 아주 죽을 뻔 했다는 말에 준식은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성준을 보며 동기들 중에 가장 크게 엉엉 울었다. 야, 니가 왜 우는데. 성준은 멋쩍은 표정으로 우는 준식의 머리카락에 제 큰 손을 얹었다. 씨발놈아, 콱 뒤져버리지 그냥. 니가 몸이 열 개야? 왜 거길 뛰어들고 지랄이야, 지랄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성준도 알았다. 알고 보면 정도 많고 눈물도 많았다. 그래서 그냥 걱정해줘서 고맙다는 말만 했다. 준식은 눈이 퉁퉁 붓도록 울다 지쳐 성준의 침대에 엎드려 잠들었다. 그렇게 잠든 준식을 보니 칼 맞은 상처보다 가슴이 더 욱씬거렸다. 그러면서도 자꾸 웃음이 실실 나서, 나 진짜 얘 존나 좋아하나 보다. 라고 성준은 생각했다. 그렇게 말로 표현이 안 되는 진심을 알게 되니 이제는 서로 쌍소리를 해도 그 기저에 깔린 게 뭔지 읽을 수 있었다.


그렇게 투닥거리며 몇 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좋아한다는 말은 성준이 먼저 했다. 무드도 없고 감동도 없이 한 겨울 입김을 불며 옥상에서 각자 담배를 태우고 있었을 때였다. 어제 뭐 먹었냐 묻는 것처럼 야, 성준식. 좋아한다. 하고 성준이 멋대가리 없이 말했다. 하도 기가 차서 준식이 뭐라고 말을 하려는 찰나, 성준이 그 입술을 제 입술로 막았다. 준식도 딱히 거부하지 않았다. 사귀자는 말은 낯간지러워서 못했지만 분명히 그 때부터였다. 그러니까 입술도 섞고, 마음도 섞고, 살도 섞었겠지.












“…다고 생각됩니다. 사용된 무기는 영국제L96A1 저격 총으로 확인되며 총탄은…”


성준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야물딱지게 피피티를 발표하고 있는 준식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회의실의 핀 조명이 준식의 하얗고 작은 얼굴과 동그랗게 벌어지는 입을 비추었다. 평소 늘 입고 다니던 가운과 다르게 오늘은 큰 회의라 그런지 단정한 제복 차림이었다. 몸에 딱 피트되는 옷은 준식의 몸을 더 슬림하게 만들었다. 과학수사팀 성준식 팀장. 이제는 팀장의 이름을 달고 있는 준식은 별로 변한 게 없었다. 성준은 문득 준식을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재수없고 콱 쥐어박고 싶었던 얼굴이 이제는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해서 놀라웠다. 4년동안 내내 지지고 볶고 싸워댔지만 이제 준식은 누가 뭐래도 확실한 제 편이었다. 확실한 내 편.


최근 천팀장이 있는 MS-A팀의 실종으로 인해 전체가 비상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비상 회의가 소집되고 있었다. 성준은 문득 제 옆자리에 앉아 기척도 내지 않는 해준을 돌아보았다. 해준의 앞에 놓인 보고 자료는 아직 한 페이지도 넘어가지 못한 채 제자리였다. 야, 강해준. 성준이 들고 있던 펜으로 해준의 옆구리를 찌르며 낮게 속삭였다. 정신 안 차려? 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펜을 물고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해준을 보다 못한 성준이 그를 찔러대자 해준은 막 잠에서 깬 사람처럼 흐릿한 눈을 깜박였다. 맛이 갔네, 완전 맛이 갔어. 앞에 놓인 생수를 따주자 바싹 마른 얼굴로 물을 넘기는 꼴을 보며 성준이 혀를 찼다. 멀쩡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천관웅이 없으니 그 강해준이 이 정도로 흔들릴 줄도 몰랐었다. 애초에 목숨 걸고 하는 업무에 여러 번 투입되다 보니 성준이야 생에 큰 미련은 두지 말자고 생각하며 살아왔었는데, 남아있는 사람의 고통을 지켜보는 건 사실 더 괴로운 일이었던 거다.


성준은 준식을 보았다. 생사의 기로에 놓이게 되면 누가 먼저 생각이 날까? 만약 내가 죽으면 성준식은 날 위해서 얼마나 울어주려나? 문득 예전에 제 앞에서 아이처럼 울던 준식이 생각났다. 준식이 우는 걸 보는 건 질색이다. 더군다나 그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면, 그건 더더욱 싫다. 성준은 색이 죽은 얼굴을 한 해준을 다시 돌아보았다. 거기에 준식을 대입해보니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먹어.”
“이게 뭐야?”


평소엔 사무실 근처에도 오지 않더니, 난데 없이 찾아와서는 이상한 짓거리를 하고 있었다. 준식은 성준이 제게 불쑥 내민 종이봉투를 열어보았다. 종합비타민과 영양제, 그리고 에너지 바 한 박스와 초콜렛, 허브티 티백, 주스 등 온갖 잡다한 것들이 마구 섞여있었다. 뭔데, 이거. 준식은 자리에 앉아있는 터라 자신의 앞에 불뚝 서 있는 성준을 상대적으로 올려다보았다. 사람이 갑자기 안 하던 짓 하면 죽는다고 했는데.


“쳐먹고 오래 살라고.”
“뭐?”
“맨날 비실비실해서 병 나지 말고.”
“이 새끼가 드디어 돌았나…”


오래 살라고 말하는 성준의 표정이 자못 비장하기까지 해서 준식은 황당했다. 얘 진짜 왜 이러지. 무슨 일 있나? 어디 아픈가? 준식은 성준에게 이리 가까이 와보라고 손짓했다. 성준이 책상을 짚고 준식에게 고개를 숙여왔다. 준식은 제 이마와 성준의 이마에 동시에 손바닥을 올려놓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다, 열은 없는데. 성준은 제 이마 위로 얹어진 준식의 마른 손을 내려 제 큰 손바닥 안에 꽉 쥐었다. 준식의 차가운 손이 성준의 뜨거운 손바닥 안에서 미지근하게 녹았다. 너 뭐… 할 말 있냐? 답지 않게 뜸을 들이는 꼴을 보며 준식이 먼저 물었다. 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니 어떤 말이든 씨부려보렴. 그런 준식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성준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있잖아. 넌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죽으면 어떻겠냐.”
“뭐?”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너도 알다시피 그럴 일 없다는 보장은 없잖아.”
“씨발, 뭔 재수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왜 또 칼빵 맞고 싶냐? 몸이 슬슬 근질근질해?”
“그런 게 아니고…”


후우, 준식이 길게 한숨을 뱉었다. 아무래도 천팀장의 일 때문일 것이다. 성준이 지금 이딴 소리를 하고 있는 게. 마음은 알지만, 준식이라고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래를 걱정하며 겁을 내기엔 현재가 더 좋았다. 그냥 이 새낀 언제까지고 단순무식한데다 지 멋대로 꼴리는 대로 사는 게 더 어울렸지, 새삼 이런 고민을 하는 성준이 준식은 낯설었다. 우리도 나이가 들어 변하고 있는가 보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니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으니까.


“야, 하성준.”
“어.”
“너 그딴 소리 한번만 더 해봐. 아주 내가 지옥까지 쫓아가서 다시 죽여버릴 거야. 내가 너 가만히 놔둘 줄 알아?”
“……”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 괜히 헛소리 해서 사람 맘 싱숭생숭하게 만들지 말고.”


하성준이 죽는다. 생각만 해도 싫다. 준식이 제 손바닥 안에 얼굴을 묻었다. 지금은 어떤 표정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작은 얼굴이 상대적으로 크고 긴 손가락에 폭 가려졌다. 성준은 그런 준식을 보았다. 불안하게 만들고 싶었던 게 아니었는데. 그냥, 혹시라도 남겨질 니가 걱정이 돼서. 그런데 지옥까지 쫓아온다고 하는 걸 보니 괜한 걱정이었나보다. 성준은 씩 웃었다. 그래, 니 말대로 재수 없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지. 지금은 너랑 나랑만 생각하는데도 모자라니까. 성준은 준식의 눈 높이에 맞게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여전히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작은 몸을 끌어다 양 팔로 힘주어 꽉 끌어안았다.


“미안.”
“꺼져, 씨발놈아.”
“우리 준식이 때문에 절대로 죽지 말아야지.”
“오래 살어, 새끼야.”
“그래, 우리 아주 오래오래 같이 살자. 벽에 똥칠할 때까지.”
“드럽게.”


우리, 같이, 계속. 시간이 허락되는 한까지. 성준은 준식의 보슬보슬한 머리카락에 쪽쪽 입을 맞췄다. 얼굴 좀 보여줘 봐. 보고 싶어 죽겠어. 성준이 가리고 있는 손을 억지로 끌어내렸다. 준식의 눈가가 그렁그렁했다. 그게 안쓰러워 또 쪽. 준식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성준의 얼굴을 밀어냈다. 침 냄새 난다고! 칭얼대는걸 아랑곳 않고 얼굴 여기저기를 계속 쪽쪽거리고 있는데 준식이 중얼거렸다. 야, 근데 넌 무슨 프로포즈를 그딴 식으로 하냐? 뭐? 프로포즈? 준식의 말에 이번엔 성준이 빵 터졌다. 죽을 때까지 같이 살자고 했으니 이게 프로포즈 뭐 비슷한 거였나. 하기사, 한쪽 무릎까지 꿇고 있는 자세가 꽤 그럴싸했다. 여전히 웃고 있는 성준을 보며 준식은 매너가 똥이라느니, 무드가 없다느니, 분위기는 개한테 줬냐느니, 정작 중요한 반지는 어디 간 거냐고 끊임없이 불평불만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래, 우리 결혼할까? 이제 두 집 살림 좀 합쳐봐? 성준의 농담에 준식은 가차없이 얼굴을 밀어내며 다음 번에 다시 제대로 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입이 댓발이나 나와서 퉁퉁 부은 그 입술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워서 성준은 준식의 입술로 돌진했다. 아, 미친, 여기, 사무실, 이라고… 성준의 키스에 준식의 말이 자꾸만 뚝뚝 끊겼다. 준식의 무릎 사이로 제 허벅지를 밀어 넣은 성준이 의자를 붙잡고 더 거칠게 입을 맞추었다. 끼이익- 의자가 한계치까지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

 

영이는 국과수에서 넘어온 분석 결과를 손에 쥐고 바쁜 걸음을 옮겼다. 며칠간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자꾸만 나오는 하품에 입이 쩍 벌어졌다가 닫혔다. 그래도 성질 더러운 제 사수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맞추려면 한시라도 빨리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했다. 16층 맨 끝. 과학수사팀이라는 명찰이 걸린 조그만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어쩐 일인지 출입문은 평소와는 다르게 한 뼘쯤 벌어져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 안으로 들어서려고 했던 찰나, 뭔가를 보고는 영이의 동공이 커지고 입이 다시 쩍 벌어졌다. 세상에. 맙소사!


끼익, 낡은 의자의 소리가 요란했다. 거의 넘어갈 듯한 각도로 꺾인 의자 위엔 제 사수가 눕다시피 앉아있었고 그 위엔 경호팀 하성준 팀장이 올라타고 있었다. 더군다나 두 사람은 지금 격렬하게 입을 섞고 있는 중이었다. 질척거리고 요란한 소리가 남사스러워서 영이가 잔뜩 얼굴을 붉혔다. 미친, 신성한 직장에서 저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아니 그나저나 저 두분, 맨날 티격태격하고 욕하는 사이 아니었어? 저건 대체 뭔데? 문 틈 사이로 보이는 풍경에 쨍하게 굳은 영이는 아랑곳 않고 두 사람의 농도는 자꾸만 더 깊어지고 있었다. 준식은 이제 성준의 목을 제 양팔로 끌어안고 한껏 매달렸다. 성준은 그런 준식의 뒤통수를 바짝 끌어당겼다. 더 깊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한 입술이 틈 없이 맞물렸다. 성준의 손이 준식의 목덜미를 지나 마른 등을 쓸다가 얇은 허리를 지분거렸다. 준식의 앓는 듯한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어차피 저 상황에 뭐가 들리지도 않겠다만, 영이는 열린 문을 소리가 나지 않도록 신경 써서 아주 조심스럽게 닫았다. 저 흥을 깬다면 사수가 자기를 죽이려 들 것이다.


아니 그나저나, 내가 뭘 본거야. 화끈거리는 얼굴에 연신 손바닥으로 부채질을 하던 영이는 그래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언제 들어가야 하는가, 나는 어디? 여긴 누구? 잠깐 동안 아노미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기도 잠깐. 어이, 안영이! 저쪽에서 제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인사하는 석율과 그래를 본 영이가 먼저 달려나가 두 사람을 반대쪽 휴게실로 질질 끌고 갔다. 커피, 우리 커피 마셔요! 난 우리 잘생긴 안영이씨가 그렇게 나랑 커피를 마시고 싶어서 안달이 난 줄 몰랐네? 석율의 농에도 영이는 양 팔에 석율과 그래를 끼고 그저 전진, 또 전진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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