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웅해준성준] Inside And Out

 

 

 

 

 

 

 

 




엘리베이터 안에는 무거운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해준은 평소보다 숫자가 지나치게 느리게 올라가는 층수에 시선을 고정하다가 포기한 듯 눈을 감았다. 제 뒤쪽,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어 서있는 누군가의 존재감에 숨이 콱 막혔다. 그런 해준과는 다르게 비교적 여유로운 듯 난간에 손가락을 두드리던 관웅은 반듯한 뒷모습만 제게 보이는 해준에게 느릿하게 말을 걸었다.


“강해준.”
“……”
“해준아.”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퍽 다정했다. 그래서 더 괴로웠다. 해준은 따끔하게 잠긴 목에서 간신히 말을 끄집어냈다.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더 이상은. 예전 그 어느 때처럼.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는 듯한 관웅의 태도에 신물이 났다. 너는, 참 똑같네. 해준아. 너는 어째 하나도 변한 게 없어. 관웅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해준을 조롱했다. 해준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고 가방을 쥔 손은 주먹을 더 꽉 쥐었다. 14층에서 15층으로 깜박이며 넘어가는 숫자의 흐름.


“사람이 너무 곧으면 부러지는 법이지.”
“……”
“그래서 난 널 보면, 한번쯤은 그렇게 해보고 싶더라고.”


어디까지 부서지고 망가질 수 있을지. 그게 궁금해.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관웅은 해준의 어깨를 꾹 쥐었다 놓고는 먼저 해준을 지나쳤다. 한참이나 열렸던 문이 다시 닫히기 직전 누군가 급하게 열림 버튼을 눌러댔다. 야, 강해준! 성준의 얼굴을 보는 순간 해준이 참았던 숨을 터트리듯 기침을 했다.












Inside And Out
천관웅X강해준X하성준












멍청한 새끼.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해놓고.


해준이 쥐고 있던 서류의 끝이 둥글게 우그러졌다. 아직도 그를 생각하면 손안이 축축했다. 해준은 관웅의 도발에 너무 쉽게 반응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그의 말대로 해준은 아직도 제자리였다. 진작에 떠난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주변을 빙빙 돌기만 할 뿐, 궤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위성과도 같았다.


해준은 손 안의 구겨진 종이를 보며 예전 그 어느 날 제 손안에 똑같이 구겨져 있었던 청첩장을 생각했다. 신랑 천 관웅.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진 하얗고 광택이 났던 종이를 차마 찢거나 그의 얼굴에 던지지도 못하고 그대로 들고 서있었다. 나한테… 무슨 말이라도 해봐요. 무슨 변명이라도 좋으니 제발. 입술을 덜덜 떨며 말하던 해준에게 관웅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언젠가 이렇게 될 거, 알고 있었잖아. 그래도 우리 사이는 달라질 거 없어. 그 날은 해준이 관웅을 혼자 바라만 보던 날부터 3년째, 연애 비슷한 이름의 관계가 2년째 지속되던 날 중에 하나였다. 눈이 많이 오던 12월. 해준은 관웅의 결혼식에 꾸역꾸역 참석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축의금을 내고, 신랑신부가 입장하고 퇴장할 때까지의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집에 오자마자 꾸역꾸역 삼켰던 식사를 모두 게워내면서 해준은 울었다. 다시는 누군가에게 맘을 주고 싶지 않았다.












성준은 해준의 얼굴을, 정확히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볼이 홀쭉하도록 빨아들이는 그 모습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담배 다시 피워? 끊었다더니. 성준의 말에 해준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됐어. 하는 말에 성준은 다 피운 꽁초를 비벼 끄고는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인지 성준은 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가 인상을 쓰다가 한참 입을 달싹이다가 닫았다가는 했다. 그리고는,


“아침엔 왜 그랬어.”
“뭐가.”
“너 금방이라도 졸도할 것 같은 얼굴로 서 있었던 거 기억 안나?”


성준의 물음에 이번에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해준은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 담배만 태웠다. 뿌옇게 올라가는 연기를 보며 성준은 회상했다. 아침에 엘리베이터로 이어진 복도에서 관웅을 마주쳤을 때, 예의상 고개 숙여 인사하는 성준을 보며 관웅은 뭔가 좋은 일이 있는 사람처럼 웃으며 성준의 어깨를 토닥였다. 거기서부터 기분이 더러웠다. 그리고 관웅이 내린듯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막 닫히려는 순간, 그 안에서 질식할 것 같은 표정으로 하얗게 질려 있던 해준을 발견했다. 급하게 열림 버튼을 누르며 이름을 부르자 해준은 발작적으로 기침을 하며 휘청거렸다. 너 어디 아프냐는 성준의 말에 고개를 저은 해준이 정신 없는 표정으로 성준을 밀치고 엘리베이터를 나섰다. 성준은 뭔가가 찜찜했다.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너 설마, 아직도 천과장님이랑 제대로…”
“아니야, 절대.”


아닌데. 넌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데. 왜 미련이 덕지덕지 붙어서 휘둘리는데! 성준은 치밀어 오르는 짜증과 분노를 표현하는 대신 담배를 들고 있지 않은 해준의 왼손을 제 큰 손으로 꽉 쥐었다. 뭐 하는 거야, 놔. 하는 말에도 아랑곳 않고 이번에는 해준의 얇고 긴 손가락 사이로 투박한 제 손가락을 꼼꼼히 얽었다.


“강해준.”
“놔.”
“지금 니 옆에 있는 사람 나야. 씨발! 천관웅 그 새끼가 아니라, 하성준이라고!”
“너야말로 뭐라도 된 것처럼 굴지 마.”


해준의 차가운 말에 성준이 잡고 있던 손의 힘을 풀었다. 기가 차다는 듯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해준은 가볍게 성준을 뿌리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옥상의 출입구로 향했다. 다 지겹고, 다 더럽고, 정말 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애초에 성준에게 관웅과의 관계를 들키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처음부터 관웅을 사랑하지 말았어야 했다. 해준에겐 그게 너무 크고 유일한 약점이었다. 그리고 그 약점을 쥐고 제 머리 위에서 흔들던 성준은 관웅의 결혼 이후로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떠도는 자신에게 다른 식으로 다가왔다. 동정? 연민? 호기심? 그게 뭐든, 성준의 고백에도 해준은 차게 마음을 닫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제 다시는 누군가에게 맘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준은 끊임없이 점점 더 안으로 파고 들어왔다. 마음에 제 자리 한 켠을 내달라고 시위하고 있었다. 해준은 버거웠다.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관웅과 이제 시작된 게 분명하다고 말하는 성준 사이에서 위태롭게 서 있었다.












커피가 한 방울씩 뚝뚝 떨어졌다. 머신 앞에 서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뒤로 탕비실 문이 닫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 익숙하고 여유 있는 걸음걸이. 해준의 뒤에 서서 어깨에 제 턱을 기대고 한 손으로는 허리를 감싸 안은 관웅이 뻣뻣하게 굳어있는 해준의 귓가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쉬이- 착하지. 손에 들고 있는 뜨거운 커피를 놓지도 못하고 해준이 그대로 서있었다. 관웅의 손이 노골적으로 제 허리와 골반을 훑어댔다. 빳빳하게 잘 다려진 셔츠를 타고 오르는 뱀처럼 익숙한 손길을 해준이 가까스로 붙잡았다. 왜 이러십니까. 진짜 나한테 왜 이러세요. 해준은 문이 열릴까 차마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유부남은 매력 없어?”
“……”
“니 몸이 아직도 이렇게 날 기억하는데?”


해준의 무릎이 풀썩 꺾였다. 관웅이 그런 해준의 몸을 압박하듯이 더욱 옥죄어왔다. 거의 관웅에게 기댄 체로 해준이 숨을 헐떡였다. 간신히 붙잡은 손이 다시 제 몸을 배회하고 있었다. 호흡이 엉키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빨리, 벗어나야 해. 안 그러면 정말… 빨간 불이 깜박깜박.


사람이 너무 곧으면 부러지는 법이지. 그래서 난 널 보면, 한번쯤은 그렇게 해보고 싶더라고.
어디까지 부서지고 망가질 수 있을지. 그게 궁금해.


관웅의 목소리가 해준의 머릿속을 타고 멋대로 돌아다녔다. 유연하지 못하게 잔뜩 휘어져 있는 나뭇가지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꺾여있었다. 해준아. 우린 달라진 거 없어. 그러니까 너만 이 자리로 돌아오면 돼. 너는 나를, 좋아하잖아. 해준의 귀 뒤쪽에 깊게 입을 맞춘 관웅이 서서히 제 몸을 떼어냈다. 타이밍 좋게 탕비실 문이 벌컥 열리고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세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형형하게 부딪혔다.


“아, 어린 애랑은 적당히 놀고.”


경고하듯 말하는 목소리는 해준이 아니라 성준을 향해있었다. 누구 것인지 똑똑히 보라는 듯한 자신만만한 태도로 관웅은 성준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씨이팔, 낮게 가라앉은 성준의 욕지거리가 들렸다. 쾅. 어딘가를 주먹으로 쳐 내리는 소리까지. 성준의 이성이 끊어졌고 해준은 자리에서 무너졌다. 벽을 따라 흘러내린 몸이 잔뜩 웅크려져 자꾸 안으로만 파고 들었다.


“하성준. 가.”
“싫어.”
“제발… 가. 오지마.”
“이제 니 말 안 들어.”


달칵- 문이 잠기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성준이 여전히 쪼그려 앉아있는 해준의 앞으로 다가와 같은 눈높이로 제 몸을 구부렸다. 해준의 발치에 물웅덩이가 고여있었다. 뚝. 뚝. 커피처럼 쓰고 진득했다. 성준은 심호흡을 했다. 고르지 않으면 아무 욕이나 터져나올 것 같았다. 머리가 터질 것 같이 폭주하다가도 얼음처럼 차게 식었다. 젖어있는 턱을 억지로 잡고 들어올리자 해준의 얼굴이 들어왔다. 확실히 상처받아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하고서도 온몸으로 거부했다. 자신을.


“뭐든지 칼같이 하면서, 왜 저 새끼한텐 무르게 구는데? 대체 왜!!”


아직도 좋아서 미치겠어? 남의 가정 파탄 내고 싶어서 안달이 났어? 너 버리고 결혼까지 한 놈이 뭐가 좋다고, 정말로, 너 왜 그러냐고, 성준은 해준의 몸을 흔들며 악다구니를 쓰다 제 풀에 진이 빠져 널부러졌다. 그래, 내가 뭐라고. 너한테 내가 뭐라고. 그래도 나는.


“좋아하잖아.”
“……”
“내가 너를 좋아하잖아.”


이제 그만하면 안돼? 이제 좀 무뎌지면 안될까. 성준은 대답 없는 해준의 눈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정말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아서 텅 비어있었다. 마음이 아파서 성준이 해준의 머리를 제 가슴으로 바짝 끌어다 안았다. 그리고 별로 조심스럽지 않은 투박한 손길로 해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힘들고, 외롭고, 무서웠지?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성준이 해준의 뒷목과 어깨를 쓸었다. 그제서야 정제되지 않은 울음이 꺽꺽 터져 나왔다. 해준의 곧은 가지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정말로 다시는 누군가에게 맘을 주고 싶지 않았는데.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더 꼭 끌어안는 품이 너무 넓었다. 밀어내자, 밀어내자 하면서도 그렇게 한참을 그 안에 머물러 있었다.












+

 

성준은 깊게 잠이 들어 있었다. 옆에서 옅게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준은 몇 번이나 뒤척이며 손 안에 쥔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무음으로 해놓은 핸드폰은 메시지가 들어온 듯 연신 램프가 깜박거렸다.
열어볼까, 말까. 후회할까, 말까.


“가지 마…”


잠결에 무슨 잠꼬대를 하는지 가지 말라는 말과 함께 성준이 해준의 몸에 팔을 감아왔다. 조심스럽게 치워내려고 하니 오히려 더 바싹 엉겨왔다. 등 뒤로 체온을 느끼며 성준의 품 안에서 해준은 핸드폰 잠금을 풀었다. 옅은 불빛이 새어 나왔다. 진작에 지웠어도 익숙한 번호가 한눈에 들어왔다. [보고 싶다.] 짤막한 내용은 군더더기가 없었다. 너무 그다워서, 그리고 뻔뻔해서. 삭제버튼을 누르는 순간, 뒤이어 새로운 메시지가 날아왔다.


[소꿉놀이는 할만하니?]


해준은 문자를 몇 번이고 읽었다. 관웅은 해준의 머리꼭대기에 있었다. 소꿉놀이라니, 언제라도 수틀리면 장난감을 부숴버릴 것처럼… 해준은 자신을 안고 있는 성준의 팔을 붙잡았다. 마음이 초조하고 더할 나위없이 불안했다. 성준이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가지 마. 강해준, 아무데도… 가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