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준백기] 싫은 건 아닌 그런 사이

 

 

 

 

시계는 오전 열 한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조금은 무료하기도 하고, 점심시간이 기다려지기도 하는 그렇고 그런 시간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철강 팀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모니터와 책상 위의 늘어놓은 서류를 보며 각자의 키보드를 부산하게 두드리는 소리, 업무를 위해 거래처나 타 부서와 나누는 잠깐의 통화 같은 것을 제외하면 사무실 내에서 불필요한 소음은 없는 편이었다. 일중독자로 의심될 정도로 매사 깔끔하고 완벽한 업무처리를 하는 강대리가 그런 팀 분위기에 한몫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자리에 앉아 이제서야 조금씩 자잘한 업무를 분담하고 있는 장백기 또한,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싫은 건 아닌 그런 사이
강해준X장백기












해준은 아침 내내 펼쳐놓았던 서류를 한 데 모아 톡톡 모서리를 책상에 부딪혔다. 그리고 가지런히 정리된 것을 들자마자 입을 열었다. 장백기 씨. 이 서류 두 부 복사해서… 해준은 여전히 시선은 제 모니터에 고정한 채 바쁘게 백기의 이름을 불렀다.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기의 쪽은 여전히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해준이 블루투스를 만지며 다시 한 번 이름을 불렀다.


“장백기 씨.”
“……”


그런데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커녕 인기척 또한 없었다. 그제서야 장시간 고정되었던 뻐근한 목을 돌리며 해준이 백기가 앉아있는 제 옆자리를 쳐다보았다. 내내 무표정이던 해준의 눈썹이 뭔가 불만인 듯 반쯤 들렸다 천천히 내려왔다. 제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장백기는 분명히 자신의 자리에 앉아있는게 맞았다. 그런데 그 모습이 조금 이상했다. 아무런 미동도 없이 고개를 조금 숙인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른손엔 들고 있던 펜도 그대로 쥔 채였다. 설마 잔다던가, 잠들었다던가, 숙면을 취한다는 건 아니겠지. 그런 몰상식한 사람은 아닐 거라 믿으며 해준은 미간을 좁힌 채 백기를 쳐다봤다. 들이쉬고 내쉬는 숨에 백기의 가슴이 들썩거렸다 툭 떨어졌다. 이봐요, 장백기 씨. 해준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발자국 성큼 다가가자 이제는 듣기에도 거친 호흡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장백기 씨. 혹시 어디…”


순간이었다. 어디 아픕니까, 해준이 채 말을 뱉기도 전에 의자에 파묻혀있던 몸이 맥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백기가 위태롭게 앉아있던 의자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뒤로 밀려 파티션에 쾅 부딪혔다. 쓰러진 백기의 안경이 벗겨지며 바닥 어딘가를 굴러다녔다. 소란을 듣고 바로 옆 팀 사람 몇이 달려왔다. 해준은 망설임 없이 주위의 도움을 얻어 백기를 들쳐 업고는 의무실로 달려갔다. 그제야 등에서 느껴지는 백기의 온 몸이 불덩이였다.












백기는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아까보다 호흡이 안정되긴 했지만 여전히 얼굴은 열에 들떠 붉게 달아오른 채였다. 체온을 내리려고 해준은 백기의 타이를 풀어내고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 젖혀놓았다. 평소의 각 잡힌 모습과는 달리 단정했던 앞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안경을 벗은 백기의 맨 얼굴은 날카로움보다는 어쩐지 소년 같은 인상을 주고 있었다. 추운지 잘게 몸을 떠는 백기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는 해준의 얼굴은 여전히 그 속을 알 수 없이 무표정했다.


해준은 알았다. 장백기는, 그의 의욕만 앞선 마음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려고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회사에게, 특히 사수인 자신에게 인정 받고 싶어 발버둥치는 그 어린 마음을 해준은 고스란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신입 때 모습과 아주 꼭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의 실수도 똑같이 반복하게 하고 싶지는 않아 더 엄격하게 굴었다. 기본의 기본까지 강조하며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백기가 그런 자신에게 자존심이 꺾이고 상처받는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만 버티고 나면, 누구보다 제대로 키워줄 자신이 해준에겐 있었다. 그런데, 고집을 꺾으랬지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할 정도로 몸을 축내라는 건 아니었다. 힘 없이 떨궈진 손목을 보며 해준은 어쩐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프면 아프다고 얘기를 해야지. 왜 미련하게 구는 겁니까, 장백기 씨는.”


대답이 없는 얼굴을 응시하던 해준이 손을 뻗었다. 백기의 감긴 눈 위를 머뭇거리던 손가락이 엉망으로 흐트러진 앞머리를 이마 위로 쓸어내었다. 뜨겁고 부드러운 피부가 손끝에 만져졌다. 이마를 배회하다 타고 내려온 손가락이 백기의 속눈썹에 걸렸다. 그리고 남자답게 잘생긴 코끝을 지나 조금 더 대담하게, 뜨거운 숨을 뱉는 입술 위로 안착했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는. 불에 데인 듯 해준이 황급히 손을 떼어냈다. 타이밍 좋게 걸려온 전화에 해준은 급히 의무실을 벗어났다. 열이 옮은 듯 얼굴이 화끈거렸다.












점심시간. 어쩐지 입맛도 상실한 해준은 사무실의 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모니터에는 엑셀 창 하나 띄워지지 않은 채 화면 보호기만 신나게 돌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의자에 몸을 푹 기대고 앉아 양 팔을 쭉 뻗었다. 뻐근한 몸이 금세 비명을 질러댔다. 지금은 업무고 뭐고, 머릿속이 통 시끄러워 죽겠다. 그대로 모니터만 노려보던 해준이 자연스럽게 옆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비어있는 백기의 자리를 보니 또 기분이 나빠졌다. 원래도 없었고, 없어도 상관없었던 자리인데. 신경 쓰지 않으면 좋겠는데 왜 자꾸… 복잡한 속을 태우러 해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옥상에 가서 담배라도 피고 오면 좀 나을까 싶어서였다.


탕비실로 걸음을 떼려는 그 때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비틀비틀 이쪽으로 걸어오는 장백기가 보였다. 좀 더 누워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잠에서 깨자마자 급히 사무실로 올라온 모양이었다. 여전히 조금 흐트러진 모양새의 백기는 정신이 없어 보였다. 일단 안경이… 아, 안경을 어디다 뒀더라. 백기는 누군가 제 자리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안경을 주워 썼다. 다행히 망가지진 않았지만 떨어질 때 이리저리 굴러서인지 눈앞이 선명하지 않았다. 뿌연 시야에 눈을 좁히던 백기가 제 자리 근처에 선 해준을 발견하고 고개를 숙였다.


“강대리님.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기억은 납니까? 그리고 뭐가 죄송하다는 건데요.”
“네? 제가 업무에 차질을…”
“장백기 씨 없어도 내 업무에 차질 없습니다.”


아, 먼저 몸은 좀 괜찮냐고 물었어야 했는데. 병원에 가보라고 해야 하는데. 해준은 마음과는 다르게 날이 설 만큼 차가운 말만 나가는 자신의 입을 원망했다. 채 눌러 담지 못한 화가 들끓었다. 백기는 꾸중 듣는 어린 애처럼 시선을 바닥에 뚝 떨어뜨린 채 자신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저런 기운 없는 모습을 보니 더더욱 짜증이 났다. 대체 왜 화가 나는지도 모르겠어서 그게 더 화가 났다. 이상했다. 해준은 숨을 고르고 백기의 자리에 있는 외투와 가방을 챙겨 백기에게 안겼다.


“오늘은 일단 들어가요. 체력 관리도 업무의 기본 중 하나입니다.”
“……”
“아프면 내일까지 쉬어도 됩니다. 위에는 내가 말해놓겠습니다.”


됐으니까 가보세요. 해준은 여전히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는 백기를 지나쳤다. 이 이상 있다간 더 좋은 소리가 못 나갈 것 같아서였다. 늘 평온을 지켰던 마음이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그 때 자신을 지나치는 해준의 걸음을 백기의 힘없는 목소리가 붙잡았다. 조금 쉬어있고 땅으로 꺼질 듯 작았지만 조용한 사무실 안에서 이상하게 그 목소리만큼은 또렷하게 들렸다.


“대리님은…”
“…….”
“정말 제가 싫으신가 봅니다. ”
“장백기 씨.”
“이전에, 대체 왜 제가 싫으신 거냐고 물었었죠. 이제 알겠습니다.”


백기는 외투를 걸치지도 않은 채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을 벗어났다. 자동문 밖으로 사라지는 그 위태로운 뒷모습을 보던 해준이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저렇게 보낼 수는 없을 것 같다.


해준은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걸어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백기의 손목을 붙잡았다. 강한 악력으로 몸을 돌려세우자 감추고 있던 표정이 드러났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백기는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백기의 두 눈에 원망이, 서운함이 금방이라도 흘러 넘칠 것 같이 차 올랐다.


“화가 나서 그랬습니다.”
“대리님, 이거 놓으…”
“걱정하는 법, 난 모릅니다. 그저 당신이 아파서 화가 납니다.”
“……”
“당신이… 신경 쓰여 죽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아프지 말아요. 해준이 여전히 백기의 손목을 붙잡은 채 백기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었다. 아까는 분명히 놀랄 만큼 뜨거웠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서로의 체온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해준의 몸에도 어느새 열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터질 듯 고여있다 마침내 흘러 내린 눈물에 해준이 백기의 축축한 볼을 어루만지며 진득하게 시선을 맞춰왔다. 백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런 해준을 보고만 있었다. 사실, 머리는 두드려 맞은 것처럼 어지럽고 지금 제게 벌어진 상황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시야는 자꾸 탁해졌다 맑아지기를 반복했다. 백기는 제가 왜 우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해준은 멍하게 서 있는 백기의 가방을 뺏어 내려놓고는 들고 있던 외투를 입혀주었다. 추워 보이는 셔츠 단추도 하나하나 꼼꼼히 채워주고 나서는 엘리베이터의 내림 버튼을 눌렀다. 한 층 한 층 숫자가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어쩐지 조금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백기는 해준의 옆에 한 발자국 떨어져 섰다. 이윽고 맑은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점심시간 한 가운데라 텅 비어있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해준이 백기를 밀어 넣으며 말했다.


“나는 장백기 씨가 싫지 않습니다.”
“……”
“그러니까, 우리 내일 봅시다.”


그 말을 하는 해준의 표정에 아주 미미하게 미소가 감돌았다고, 백기는 생각했다. 늘 제게만은 딱딱하게 느껴졌던 말투도 조금은 부드럽게 느껴졌다. 표현에 서툴렀던 건 비단 백기 혼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은 어쩌면…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해준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몇 번이고 들었던 내일 보자는 말이, 오늘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


“좋습니다.”


해준의 간결한 피드백에 백기가 안도한 듯 숨을 뱉었다. 이번에는 한 번의 지적도 없이 무사통과였다. 드디어, 강대리님에게 인정 받았어…까진 아니겠지만 어쨌든 나름대로는 탁월한 발전이었다. 고생한 의미가 있었네. 서류를 받아 제 자리로 돌아가는 백기의 입 꼬리가 작게 씰룩였다. 해준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미건조했지만 이제는 그게 마냥 차갑고 사무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백기는 알았다.


‘나는 장백기 씨가 싫지 않습니다.’


얼마 전. 야근이다 뭐다 정신 없이 몸을 혹사시키고 그저 열심히 하려고 무식하게 달려들기만 했었을 때, 그래서 온 몸이 열로 들끓었던 그 날에. 자신을 싫어하는 줄로만 알았던 해준의 그 한 마디가 그 어떤 칭찬보다 제게 와 닿았던 것을 해준은 모를 것이다. 다음날 아침. 열이 내려 잔뜩 땀에 젖은 몸으로 일어났을 때에도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개운한 기분이었다. 내일 보자는 말대로 핼쑥해진 얼굴로 출근한 백기가 인사를 건넸을 때, 해준은 평소와 다름 없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제 인사를 받아주었다. 싫지 않다고 했으니까, 좋은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쳐두었던 마음의 벽도, 강해준에게 가졌던 어떤 편견도 비켜가는 느낌이었다. 백기는 해준이 다시 보였고 업무적으로든 어떤 것이든 그를 닮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마음이 열리는 것은 순간이었다.












“여기서 혼자 뭐합니까.”
“아, 대리님.”


백기가 옥상 난간에 기대어 지난 상념에 푹 빠져 있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준은 들고 있던 커피 한잔을 백기에게 건네주었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렇게 혼자 웃고 있습니까. 해준의 물음에 백기는 아무 생각 없이 대리님 생각이요, 라고 대답했다. 아… 두 사람 사이에 잠시 미묘한 정적이 흘렀다. 하.하.하. 백기가 어색한 소리를 내며 웃자 해준이 그런 백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시선이 길어질수록 백기의 얼굴은 점점 더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오해는 마십시오. 그러니까 저는…


“오해 안 했습니다.”
“네?”
“다만, 내 마음대로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언젠가, 이렇게 진득하고 깊은 시선을 느껴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고 백기는 생각했다. 여전히 눈을 떼지 않은 채로 해준은 백기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백기의 긴 속눈썹 위로 그의 손가락이 그늘을 만들었다. 자동으로 감긴 눈가를 해준이 따뜻한 손으로 천천히 쓸었다. 또 그 언젠가, 느껴본 것 같은 익숙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백기는 해준의 손길을 가만히 느끼고 있었다. 속눈썹을 지나 콧대로 내려온 손가락이 느릿느릿하게 입술 위로 안착할 때까지. 조금은 까칠한 입술을 어루만지던 해준의 손가락이 이번에는 백기의 볼과 귀 뒤를 감싸 안았다. 이 뒤로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알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키스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예상대로 해준의 입술이 아주 조심스럽게 백기의 입술 위에 포개졌다. 입술의 온도는 따뜻했고 해준의 입술은 충분히 부드러웠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이제는 해준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