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준백기] 싫은 건 아니면 무슨 사이

*싫은 건 아닌 그런 사이에서 조금 이어지는 얘기










퇴근시간이 점점 가까워 질수록 시계를 힐끔거리는 눈들이 하나 둘 늘어났다. 어차피 그래 봤자 모두 다 칼퇴하는 건 아닐 테고, 더군다나 신입인 자신의 경우엔 더더욱 해당사항이 없는 얘기였다. 하지만 오늘은 금요일. 날이 날인 만큼 뭔가 조금 들뜬 분위기였다.


백기는 조심스레 눈을 돌려 해준의 자리를 쳐다보았다. 언제 봐도 반듯한 자세와 그보다 더 반듯한 표정을 하고 일에 매진하는 해준의 모습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틀린 그림 찾기도 아니고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의 차이점을 찾을 수가 없다니. 책상도 저렇게 깨끗하다니? 인간이면 저럴 순 없을 거야. 저건 인간이 아니다. 백기의 노골적인 시선이 이어지자 얼굴이 따가워진 해준이 백기의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불현듯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백기는 딴청을 피우듯 허공을 응시하고 괜히 멀쩡한 목을 한번 돌려보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보는 해준의 입술이 비죽이 말려 올라갔다. 하여튼, 알고 보면 장백기 씨는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어. 딴 곳을 보던 백기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다시 해준을 향했을 때, 해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백기의 뒤로 걸어가는 해준의 손바닥이 백기의 어깨와 목을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짜릿한 감각에 백기는 몸을 움츠렸다. 손길 한 번에도 이렇게 반응하는 이유가 뭘까. 백기는 심난해졌다. 이게 다, 강해준 때문이었다.












싫은 건 아니면 무슨 사이
강해준X장백기












그 날, 옥상에서 해준이 제게 입을 맞춰왔을 때 자신은 왜 피하지 않았던 건지 백기는 내내 고민했다. 사실 키스도 뭣도 아니고 그저 입술을 맞대고 있었을 뿐이었지만 백기는 심장이 폭발이라도 하는 줄 알았었다. 그리고 해준은 짧은 입맞춤이 끝난 후 아무렇지 않게 제 머리를 정리해주고는 들고 온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각자 담배를 태웠다. 그게 끝이었다. 왜 입을 맞췄는지, 그저 분위기에 휩쓸렸던 건지, 해준이 자신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백기는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말을 해주지 않았으니까.


그 이후로도 해준의 알 수 없는 행동은 계속되었다. 아무렇지 않게 셔츠 위로 어깨나 팔을 쓰다듬고 간다거나 탕비실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는 자신의 등 뒤에서 어깨에 슬쩍 제 턱을 기댄다거나 하는 그런 미묘한 스킨십을 하곤 했다. 물론 싫지 않았다. 싫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해준이 제게 그럴 때마다 백기의 심장은 쿵 하고 몇 번을 바닥을 치고 올라갔다.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자 백기는 해준에게 묻고 싶었다. 우리 관계의 정의는 어떤 것이냐고.


백기는 멍하니 해준을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다. 해준이 바쁘게 업무를 처리할 때 그의 책상을 흘깃거리며 잘생긴 옆모습을 훔쳐보기도 하고 회의실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다부진 입매를 멀거니 쳐다보기도 했다. 차라리 눈 앞에 안 보이면 좀 나으려나 싶었더니 출장을 간 빈자리까지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왜. 이유가 뭔데. 정리되지 않은 미묘함이 짜증을 불러왔다.


어렸을 때부터 백기는 해답이 있는 문제가 좋았다. 답은 확실히 정해져 있고 그것을 완벽하게 풀어내는 과정은 어린 백기에겐 큰 즐거움이었다. 일류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할 때에도, 자격증 시험과 외국어를 준비할 때도, 대기업 입사를 위한 인턴 PT까지도 답은 정해져 있었다. 백기에겐 그런 것이 엘리트 코스를 밟기 위해 차근차근 밟아가는 하나의 계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원인터에 입사해 처음으로 들이닥친 난관이 강해준이었다. 도무지 제 맘대로 되지를 않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또 한번 자신을 흔들어놓는 것이다. 싫어하지 않는다는 게 어떤 의미일지, 백기에게 해준은 다시 난제로 다가왔다.










불금은 불금이었다. 이 늦은 시간까지 회사에 머무르고 싶은 사람은 없는 게 확실하다. 사무실에는 이제 해준과 백기 단 둘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누구는 사수가 퇴근을 안 하니 멋대로 하지못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해준은 억지로 백기를 묶어둘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본인의 업무로 분주했을 뿐. 둘만 있는 정적 속에서 슬슬 마무리를 하는 듯 해준이 자리를 정리하며 백기에게 말을 붙였다.


“열 시가 다 되어 가는데 장백기 씨는 퇴근 안 합니까.”
“정리할 게 좀… 남았습니다.”
“그래요?”


거짓말이었다. 석율이 동기들끼리 한 잔 하러 가자는 것도 진작에 무시하고 아까부터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파일 속에 있는 글자와 숫자들이 마구 뒤엉켜 덩어리로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도무지 일에 집중이 안 돼서 읽었던 걸 또 읽고 다시 읽고 되새김질해봐도 머릿속엔 딴 생각만 가득했다. 이를테면…


“어디 봅시다.”


불쑥, 해준이 백기의 어깨를 짚고, 앉아있는 백기의 등 뒤로 몸을 붙여왔다. 그대로 백기의 어깨가 경직되자 장백기 씨, 어깨가 딱딱하네요. 하며 해준이 큰 손으로 압을 주어 어깨를 문질러왔다. 여전히 시선은 모니터를 향해 있던 해준은 이미 더 고칠 데가 없어 보이는 완벽한 보고서를 보고는 그대로 시선을 내렸다. 백기의 속눈썹이 긴장에 파들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 긴장하면, 또 괴롭히고 싶어지니까. 해준은 백기의 단단한 턱을 부드럽게 쥐어 끌어올렸다. 백기의 얼굴 위로 음영이 졌다. 장백기 씨. 해준이 낮은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불렀다. 또 진득하고 깊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백기는 제게 입을 맞추던 그 날의 해준이 생각이 났다.


“왜 자꾸 그렇게… 쳐다보세요.”
“……”
“저는…, 대리님 마음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띄엄띄엄 말을 뱉는 백기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제 턱을 쥔 해준의 손 위로 백기의 손이 겹쳐졌다. 백기의 손가락이 해준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여전히 해준의 표정은 읽을 수가 없었다.


“대리님이 그 날 그랬죠. 제가 신경 쓰여 죽겠다고.”
“……”
“전 이제, 대리님이 신경 쓰여 죽겠습니다.”


백기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겠다. 그저 뭔가 억울하고, 지는 기분이고, 짜증이 나서 백기는 해준의 손을 치워냈다. 집에나 가야겠다. 아니, 술이나 한 잔 마시고 들어갈까. 어지러울 정도로 취하고 나면 이 속이 좀 편해지려나. 백기가 제가 앉아있던 의자를 뒤로 빼고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와 가방을 들었을 때, 해준은 여전히 제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 골똘했던 표정에 점점 웃음이 비쳤다. 뭐지? 놀리는 것도 아니고.


“술이나 한 잔 할래요? 제가 사겠습니다.”
“됐습니다.”
“금요일이잖아요. 이대로 들어가기 아쉬워서 그러니까 같이 갑시다.”


할 얘기도 좀 있고. 백기가 들고 있던 가방을 해준이 뺏어 들었다. 얼떨결에 또 해준의 페이스에 말려 백기는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자그마한 일식 주점에 들어갔다. 평소 해준이 자주 오는 곳 같았다. 미닫이 문이 있는 작은 룸 안에서 술과 적당한 안주를 시키고 마주 앉았다. 따뜻한 느낌의 적당한 조도 아래였다.










백기는 술이 오자마자 해준의 잔과 자신의 잔을 채우고는 냉큼 제 잔을 비웠다. 자꾸 목이 탔다. 해준이 비어있는 잔을 다시 채워주자 또 한 잔을 비웠다. 해준은 그런 백기를 보며 기본으로 나온 안주 몇 가지를 백기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저녁도 안 먹었으면서, 이러면 속 버립니다. 무심한 듯 하면서도 다정하고, 또 그러면서도 무심해서 사람 속을 모르겠고. 백기는 시위하듯 다시 술잔을 채워 비워냈다. 주량이 약한 편은 아니었고, 취한 것을 핑계로 추태를 부린다고 해도 어차피 그건 강대리님이 책임져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몇 잔을 각자 비웠을까. 백기의 표정이 아까보다는 조금 풀어졌다. 슬슬 취기가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쓸데 없이 뜨끈뜨끈한 좌식 바닥이 문제였다. 백기는 별 핑계를 다 대면서 맞은 편에서 턱을 괴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해준을 풀어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할 말 있으시다면서요.”
“그래요. 근데 그냥 장백기 씨 보고 있는 것도 재미있네요.”


뭐래. 짜증이 울컥 올라와 백기의 표정이 불퉁해졌다. 또 한잔을 마시려고 잔에 손을 뻗는데, 이번에는 술잔 대신 해준의 손이 백기의 손을 잡아왔다. 마음대로 만지지 마시죠. 퉁명스레 말을 하면서도 백기의 손은 그대로 해준에게 잡혀 있었다. 해준은 그런 백기를 보며 느릿하게 운을 떼었다.


“장백기 씨는 안 그런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어린애 같고, 투정도 부리고… 관심 받고 싶어하고.”
“제가 언제요.”


그건 대리님이, 제대로 말씀을 안 해주셔서 그렇잖아요. 싫지 않다고만 했지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으니까. 자꾸 사람 헷갈리게 만드니까. 투정하고 싶지 않은데 투정하는 것처럼 말이 나온다. 아씨, 망했다. 화를 내고 싶은데 해준이 자꾸 저를 보며 웃는다. 딱딱한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또 한번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술기운 때문인지 얼굴도 더 잘 생겨 보인다. 미쳤네, 장백기.


이리 와요. 해준이 제 옆자리를 톡톡 쳤다. 백기는 못 이기는 것처럼 일어나 해준의 옆에 앉았다. 밀폐된 공간에 단 둘 밖에 없는데다, 적당한 취기가 거리낄게 없게 만들어 백기는 용감하게 해준의 어깨에 어지러워지는 머리를 기댔다. 다 큰 남자들이 하기에 퍽 간지러운 모션이었으나 해준은 그런 백기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며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많이 서운했어요?”
“…네.”
“나도 생각이 많아서요. 당신한테.”


이게 어떤 감정인지. 그저 휘몰아치듯 지나갈 감정인지, 온 힘을 다해 붙들어야 할 감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백기가 그랬던 것처럼, 해준은 매일 매일 제게 와 닿는 백기의 시선을 느꼈다. 신경 안 쓰는 척 했지만 신경 쓰여 미치겠는 건 피차 마찬가지였다. 관심이 가고, 당신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새로운 모습이 다가오고. 손이 닿으면 만지고 싶어지고, 어깨가 닿으면 끌어안고 싶어지는 그런 미묘한 감정선 속에서 해준이 고민할 동안 백기는 어쩌면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애매한 자신의 태도에서.


미안합니다. 라고 말하는 대신 해준은 백기의 이마에 입술을 묻었다. 자존심 세고, 인정받고 싶어 악에 받쳐있었던 장백기가 제 품에 고분고분하게 안겨 있었다. 신기했다. 백기는 고개를 들어 해준의 이마에 장난스레 제 이마를 부볐다. 체온을 나눴던 때처럼 따끈했다. 코가 마주 닿고 입술이 금방이라도 부딪힐 것처럼 가까워졌다. 백기가 속삭였다. 그래서요, 대리님. 결론이 어떻게 났는데요.


“강해준 대리님. 우리 무슨 사이입니까?”
“……”
“이번에도 말로 하지 않으면 전 모릅니다.”
“우리는…”


장백기씨, 내일 봅시다.
내일도 보고, 모레도 보고, 그 이후에도 나는 당신을…


“매일 보고 싶은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
“장백기 씨. 좋아합니다.”


달콤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해준의 입술이 백기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손이 닿으면 만지고 싶어지고, 어깨가 닿으면 끌어안고 싶어지고, 입술이 닿으면 온몸을 삼켜 버리고 싶었다. 백기는 해준의 타이를 잡아 제 쪽으로 더욱 끌어당겼다.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입술이 마주 붙었다. 입술만 닿았던 저번과는 다르게 해준이 백기의 턱을 움켜쥐고 뜨거운 안으로 침범했다. 백기는 매달리듯 해준의 팔을 부여잡았다. 강한 파도가 치고 있었다. 감은 눈 안에서 폭죽이 터지듯 별세계가 반짝거렸다.













+

‘장백기 씨. 좋아합니다.’


좋아한다는 고백을 들었을 뿐인데, 어찌된 일인지 백기는 해준의 침대에서 눈을 떴다. 아직 사위가 파란 게 해가 뜨진 않은 모양이었다. 해준의 단단한 팔이 백기의 상박을 나무덩굴처럼 칭칭 감고 있어서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어떤 상황의 이후일 지가 뻔했다. 술이 과량 들어가 몸이며 마음이 폭신폭신해졌던 게 실수인 건가. 아, 장백기. 넌 대체. 온몸은 고장이라도 난 듯 삐걱거리고 입은 바싹 말라 단내가 났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백기는 해준의 품에서 잠시 벗어나려 몸을 뒤척였으나 어찌된 일인지 해준의 팔은 백기의 몸을 더 조여오고 있었다. 어쩌면 잠버릇이 고약할 지도. 저기요, 대리님. 네. 뭐야. 대답하는 해준의 목소리가 방금 잠에서 깨어난 사람 치고 지나치게 멀쩡했다. 백기는 안경 없는 맨눈을 찡그리며 해준의 팔을 더듬었다.


“깼어요?”
“안 자고 계셨어요?”
“두고 보니 반응이 재밌어서요.”
“네?”
“자는 모습도 귀여웠습니다.”


백기는 듣기가 민망해서 대답 대신 해준의 팔뚝을 철썩 쳐댔다. 스르륵 해준의 몸이 풀어지는 틈을 타 백기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해준이 팔을 뻗어 그런 백기를 다시 제 품에 바싹 끌어당겨 안아왔다.


“숨 막힙니다. 그리고 목이 말라요.”
“가져다 줄 테니. 잠깐만 이러고 있어요.”


맨 살갗으로 해준의 온 몸이 느껴졌다. 따끈한 체온이, 누군가의 품이 이리 안정감을 줄 수 있다니. 신기한 기분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자신을 힘들게 만들었던 사람이었다. 왜 나를 싫어하느냐고 몇 번이나 묻게 만들었던 사람이었다. 그런 해준을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사람의 앞일은 정말 한치 앞도 알 수가 없다고, 백기는 생각했다.


“대리님은, 제가 왜 좋습니까?”
“모르겠습니다.”
“무슨 대답이 그래요.”
“그걸 알게 해주는 게, 당신이 할 일입니다.”
“또 일이라니.”


농담입니다. 대리님이 하는 농담은 농담 같지 않습니다. 티격태격 말장난을 하면서도 어느새 꽉 잡고 있는 손을 놓지 않았다. 어쩌면, 당신이 신경 쓰이는 순간부터, 눈에 밟혀 어쩔 줄 몰랐던 그 때부터. 이미 마음을 준 걸지도 모른다고 해준은 생각했다. 해준은 백기의 결 좋은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샴푸 향이 풍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