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웅해준백기] Re:Born

 

 

 

 

 

 

 

 

새벽 내내 옅은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그리고 오후가 다 지나가도록 아직도 개지 않은 날씨를 확인하며 해준은 귀에 걸려있는 리시버를 신경질적으로 잡아 빼냈다. 초고층 빌딩의 통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서울 도심은 온통 희뿌연 안개가 잠식하고 있어 을씨년스러웠다. 해준은 초조함에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으로 밤새 한숨도 못 자 잔뜩 충혈된 두 눈을 내리 눌렀다. 목 안에서 자꾸 쓴맛이 넘어왔다.


[00시 45분 현장 잠입 후 현재 42시간 경과. GPS 위치추적 실패. 모든 통신 두절 상태. 생사 여부 확인 불가능.]


생존 가능성… 매우 희박. 머리로는 이미 결론이 나 있는 문제였다. 그런데,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그가 없는 42시간 동안 같은 보고를 몇 번이나 확인해야 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이제 살아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말한다. 금방 올게. 기다려. 부드럽게 제 머리를 헤집던 관웅의 단단한 손과 낮은 목소리를 해준은 기억했다. 늘 그래왔고 한번도 어긴 적 없이 멀쩡하게 돌아왔었는데. 대체 왜… 불안이 자꾸만 해준을 짓누르고 있었다.


정적을 깨고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여전히 창 쪽을 보고 서있는 해준의 뒷모습을 보며 백기는 고개를 까딱 숙였다 들었다. 팀장님. 백기의 부름에도 해준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미동 없이 앞만 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관웅이 실종된 내내 먹지도 자지도 않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해준은 자신이 늘 동경해왔던 선배 강해준의 모습이 아니었다. 늘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각이 잡히고 날이 서있던 해준은 지금은 잔뜩 무뎌져 아무것도 베지 못할 칼날과 같았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백기는 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 된다고. 주제 넘지만 어줍잖은 충고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한 마디도 건네지 못하고 백기는 한참 해준의 뒷모습만 바라보다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Re:Born
천관웅X강해준X장백기+α?












“투입된 게 다섯인데. 어째 살아 돌아온 놈이 하나도 없누.”


석율은 제 품에서 꺼낸 작은 나이프의 날을 가죽 반 장갑을 낀 손으로 훑으며 후후 불어댔다. 날카로운 단면에 제 손가락을 부드럽게 움직이는 꼴을 보며 그래는 인상을 썼다. 저러다 한번 손가락 잘려봐야 정신을 차리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직 확실히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의 말에 석율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장그래. 너도 알잖아. 아, 물론 너는 현장 안 뛰니까 모르겠지만, 자고로 현장이라는 게 말이야… 석율의 말에 그래가 발끈하며 그 놈의 현장! 이라고 중얼거렸다. 장그래는 해준이 팀장을 맡고 있는 정보보안팀 소속의 해커였다. 그리고 한석율은 경호팀 요원이었다. 그래는 자신의 팀이 하는 백업이 없으면 현장도 없다고 말했고, 그럴 때마다 둘이 한참을 투닥투닥하는 꼴을 백기는 멀거니 구경하며 감흥 없는 표정으로 제 손에 쥔 베레타를 얇은 천으로 문질렀다.


“그나저나 강팀장님이 걱정됩니다. 며칠 내내 계속 저러시는 거 보면.”
“그러니까. 하필이면 천팀장님이 그렇게 되실 줄 알았겠어.”


관웅은 이를 테면, 현장의 전설 같은 인물이었다. 다들 처음 관웅을 봤을 때를 기억한다. 피를 뒤집어쓰고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는 그 광기 어린 모습은 악귀 같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나긋하게 웃는 얼굴로 쌍욕을 하거나, 상대를 협박 하거나, 사람의 목숨을 들었다 놨다 위협할 수 있는 그 대단하신 천관웅과 MS-A팀 전원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는 지금,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쪽에 뭔가가 새나갔던 것 같아요. 그렇지 않고서야…”
“장그래, 쉿.”


셋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휴게실 뒤로 해준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국장님께 뭔가 보고를 하러 가는지 손에는 서류가 한 다발이었다. 눈치 빠르게 석율이 그래의 입을 막지 않았다고 해도 이미 사내엔 흉흉한 소문이 들끓었다. 그 후로 며칠이 흘렀더라. 어떠한 연락도 없었을뿐더러, 생사의 기색도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며 죽었으면 시체라도 나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막말을 하는 사람들의 말에도 해준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평소와 같이 일을 하고 있었지만 표정이 읽히지 않는 두 눈은 이미 새까맣게 죽어있었다. 백기는 그런 해준을 생각하다가 가볍게 몸을 일으켜 해준이 걸어가는 복도의 뒤로 따라 붙었다.








“강팀장님.”
“……”
“해준 선배.”


백기는 해준이 들고 있는 서류더미를 뺏어 들고선 오랜만에 선배라는 호칭을 입에 담았다. 해준의 시선이 그런 백기에게 향했다가 바닥으로 꽂혔다. 여기선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안 그러면 쳐다봐주지도 않으면서 그래요. 백기가 애써 씩씩하게 대꾸하고선 엘리베이터 앞에서 국장실로 가는 층수를 눌렀다.


백기는 해준과 같은 훈련기관에서 과정을 수료했다. 백기가 입소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미 해준은 이 곳에 스카우트가 되어 입사를 앞두고 있는 엘리트였다. 해준은 훈련생 중 늘 1등이었다. 암호해독, 외국어, 사격, 기초체력 등. 지금에야 정보보안팀에 발령을 받아 현장을 뛰지 않는다지만 초반엔 그도 관웅의 팀에 함께 있던 동료였다. 해준이 관웅을 동경했던 것처럼 백기도 오로지 해준만을 쫓으며 기대감에 부풀어 이 곳으로 왔을 때, 백기는 가장 찬란하게 빛나던 해준을 보았다. 그리고 그 곁엔 항상 관웅이 있다는 걸 알았다. 보고 듣지 않아도 해준이 어떤 마음으로 관웅을 담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도저히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곁에 없어 길 잃은 아이처럼 흔들리는 지금은.


“숨 좀 쉬어요. 밥도 먹고. 제발, 잠도 자고.”
“장백기.”
“안쓰러워서 미치겠으니까.”


땡. 하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백기가 들고 있던 서류를 다시 해준의 품에 안겨주었다. 멀건 얼굴로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지금보다 조금 어리고 소년 같았던 백기의 모습을 해준은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앞머리를 넘기고 은테안경을 쓴 백기의 얼굴은 이제 완연한 성인 남자에 가까웠다. 날카로운 인상을 주는 턱 선, 수트 아래로 느껴지는 단단한 골격이 해준은 낯설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며 가끔씩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는 것 또한.


“올라가세요, 그럼.”


문이 닫히는 순간 허공에서 해준과 백기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해준은 여전히 어떤 감정도 담지 않은 채였다. 백기는 주먹을 쥐어 버튼 옆의 벽을 내려쳤다. 알면서. 내가 어떤 눈으로 보는지 다 알면서! 분하고 서러워서, 넘칠 듯 일렁이는 마음을 잠재우지도 못하고 백기는 한참을 서 있었다.










*










“…다고 생각됩니다. 사용된 무기는 영국제L96A1 저격 총으로 확인되며 총탄은…”


야, 강해준. 성준이 들고 있던 펜으로 해준의 옆구리를 찌르며 낮게 속삭였다. 정신 안 차려? 중요한 회의였다. 원형의 계단식으로 이루어진 회의실 내부는 피피티를 넘기며 발표에 열중하고 있는 과학수사팀 성준식 팀장의 주변만 환했을 뿐, 다른 사람들이 앉아있는 자리는 조명이 꺼져 있어 비교적 어두웠다. 해준의 앞에 놓인 보고 자료는 아직 한 페이지도 넘어가지 못한 채 제자리였다. 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펜을 물고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해준을 보다 못한 성준이 그를 찔러대자 해준은 막 잠에서 깬 사람처럼 흐릿한 눈을 깜박였다. 맛이 갔네, 완전 맛이 갔어. 앞에 놓인 생수를 따주자 바싹 마른 얼굴로 물을 넘기는 꼴을 보며 성준이 혀를 찼다. 멀쩡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 강해준이 이 정도로 흔들릴 줄도 몰랐었다. 애초에 목숨 걸고 하는 업무에 여러 번 투입되다 보니 성준이야 생에 큰 미련은 두지 말자고 생각했었는데, 남아있는 사람의 고통을 지켜보는 건 사실 더 괴로운 일이었던 거다. 성준은 날씬한 제복 차림을 한 준식을 보았다.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야무지게 피티를 하는 고 작은 머리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물론 저건 이렇게 굴지도 않겠지만.








“성준아.”
“…야, 새삼 징그럽게.”


회의가 끝나고 성준은 해준을 끌고 옥상으로 올라왔다. 들고 온 커피를 넘겨주자 몇 모금 마시다 말고 내려놓던 해준이 하성준, 하팀장도 아니고 제 이름을 불러서 성준이 한참 사레들린 사람처럼 기침을 했다.


“많이 힘드냐? 힘들지. 그래. 오죽하겠냐. 니 맘 알아, 근데…”
“그 사람 나 두고 못 죽어. 나는 알아.”


지옥이라도 쫓아올 사람이야. 쉽게 안 죽어. 해준의 목소리가 너무 단호했고 그 믿음엔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위로하려는 듯 어깨를 토닥거리려고 뻗었던 성준의 손이 그대로 미끄러졌다. 해준은 며칠간 불안이 자신을 짓누를 때마다 이 말을 되새겼다.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어딘가에 살아서… 뚫어져라 난간 너머를 보는 해준은 지금이라도 거짓말처럼 이 곳으로 달려올 것 같은 관웅을 떠올렸다. 하지만 현실은 질척하게 젖어있는 초록색 바닥과 텅 빈 자신뿐이었다.










*










고층건물의 꼭대기 층 국장실과 그 밑으로 줄줄이 이어진 사무실과 훈련실, 의료팀이 있는 치료실과 기타 장비실을 제외하고, 몇 개의 층은 수시로 출동할 수 있도록 요원들의 간이 숙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해준은 며칠의 철야 끝에 제 좁은 사무실을 벗어나 숙소에 와 있었다. 어제 새벽, 마침내 길고 긴 기다림을 포기하듯 방으로 들어와 문을 걸어 잠그고 쓰러져 몇 시간을 잠들었다. 그리고 오늘은 어떤 연락도 받지 않고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오늘이 며칠인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당신이 없는 세상은 이렇게도 잘 굴러가고 있는데 왜 내 시간만 멈춰있는 건지. 해준은 손 안에 쥔 독한 술을 보았다. 호박색 액체가 찰랑거렸다. 평소 술을 별로 입에 대지 않는 편이지만 찬장에 관웅이 가끔 마시다가 만 양주가 남아 있다는 걸 알았다. 한 모금을 넘기고 나니 내내 비어있던 속이 타 들어가는 것처럼 활활 타올랐다. 이 독한 걸, 잘도 마셨네, 당신은. 해준이 웃으며 손 안의 잔을 굴렸다. 이상하게 자꾸 웃는데도 눈물이 나서, 이렇게 약해빠져 있는 제 모습이 해준은 우스웠다. 사람들은 말하지. 이제 포기하라고. 근데 난… 도저히 포기가 안 돼. 이제 어떡하지. 뭘, 어떻게…해야 되는데. 해준의 단단한 지반은 크게 금이 갔다. 바닥은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해준은 자신이 이 정도로 관웅을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그냥 곁에 있어서 좋은 동료이자, 동경하는 선배라고 생각했다. 거기에 하나를 더 보태자면 그냥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애틋했을 뿐인데, 옆에 없는 지금에 와서야 그게 무슨 감정이었는지 확실히 깨닫게 되다니. 멍청하게도.


비어있는 잔은 다시 채워졌다. 오늘을 그냥 다 잊으려는 사람처럼.








쿵쿵. 물 속에 잠긴 듯 몽롱한 세상이 흔들렸다. 다시 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해준은 소파에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울렸다. 멈출 생각이 없는 듯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해준은 비틀거리며 현관에 기대어 서서 잠금쇠를 풀었다. 그리고 끼익, 열린 문 앞에는 상기된 얼굴의 백기가 보였다.


“난 또, 선배가 드디어 자살소동이라도 벌이는 줄 알았지.”
“……”


백기의 목소리는 잔뜩 비틀려져 있었다. 걱정하다 못해 마음이 시커멓게 타 들어 가다가 마침내는 흰 재만 남았다. 넋 빠진 사람처럼 자신을 보는 해준을 보니 그 마음은 고스란히 화로 돌아섰다.


“정신차려요. 이미 죽었다고.”
“…말 조심해.”
“이제 그 사람 없어. 당신 지켜줄 천관웅 없다고.”
“듣기… 싫어.”
“어차피 죽었어! 왜 인정을 못 하는데!! 이러다 당신까지 죽고 싶어?”


그만… 그만해. 해준이 머리를 감싸며 백기에게서 뒷걸음질을 쳤다. 백기는 해준을 따라 반쯤 열려있던 문 안으로 들어섰다. 쾅, 하고 등 뒤로 다시 문이 굳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강해준. 제발… 그만하고 나 좀 봐줘. 해준의 몸이 힘없이 벽으로 밀렸다. 백기는 한 손으로 해준의 어깨를 찍어 누르고 다른 손으로는 강하게 턱을 움켜쥐었다. 그대로 백기의 입술이 해준의 입술을 덮었다. 흥분도 열락도 없는 키스였다. 두 사람의 입 속으로 채 지르지 못한 비명이 넘실거렸다. 해준은 무슨 상황이 일어나는지 모르겠다는 듯 잠시간 멈춰있다가 이내 백기를 양 손으로 힘껏 밀어내고는 젖어있는 제 입가를 거칠게 닦았다.


“치워.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사랑해요.”
“……”
“사랑해요, 선배.”


타이밍이 나쁜 고백이었다. 백기는 자신을 밀치고 나가는 해준을 붙잡지도 못했다. 어차피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었다. 그냥 이제는 자신의 마음도 알아달라고, 제발 나를 좀 봐 달라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 못한 말들이 흘러 넘쳐서, 끝내 터진 입 꼬리가 따끔거렸다.










*










끊어진 줄 알았던 통신에 미약한 신호가 잡혔다. 곧 숨이 꺼질 심장박동처럼 아주 잠깐 연결됐다 다시 끊어지기를 반복하기에 해준은 자신이 마침내 미쳐서 환각이라도 본 줄 알았다. 장그래씨, 미안한데 이거 확인 좀… 해줄래요? 부탁, 할게… 침착을 가장한 해준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그래는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나 해준의 옆으로 다가왔다. 티…팀장님, 이거 맞는데요. 확실하게 신호 잡히는 대로 바로 위치 확인 진행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그래의 말에 팽팽하게 당겨졌던 실이 끊어지듯 해준이 그대로 꼬꾸라졌다. 강팀장님!!! 비명을 지르는 그래의 목소리를 듣고 곧바로 옆 팀 사람들이 몇 달려왔다. 백기는 제일 먼저 바닥에 널브러진 해준을 들쳐 업고서는 그대로 달려나갔다. 정처 없이 해준의 발목이 덜렁거렸다. 등에 매달린 몸이 지나치게 가벼워서 백기는 속도를 더 내고는 제게 온전하게 매달려있는 해준을 꽉 부여잡았다.








금방 올게. 기다려. 그 날처럼 관웅은 웃으며 말했다. 해준은 그를 잡고 싶었다. 이번에는, 안 돼. 절대로 보내지 않을 거야. 절실한 마음과는 다르게 굳게 닫힌 목은 본드라도 칠한 듯 그 어떤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홀로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해준이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입만 벙긋거렸다. 안 돼. 가지 마요. 제발 가지 말아요. 해준은 신음하듯 울었다. 으으으…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아주 낮은 울음이 속에서만 터져 나왔다. 가지 마. 날 두고. 선배…


헉. 악몽에서 깨어난 해준이 숨을 헐떡거렸다. 엉망으로 젖어있는 눈가로 누군가의 투박하고 까칠한 손끝이 닿아왔다. 잔뜩 상하고 굳은 손톱 사이에서 미미한 피비린내가 풍겨왔다.


“해준아.”
“……”
“나 왔어.”


고인 눈물이 귓가로 흘러내렸다. 눈을 깜박이자 선명해진 해준의 시야로 거짓말처럼 피칠갑을 한 낯익은 얼굴이 들어섰다. 꼴이 엉망이었다. 피가 엉긴 채 굳어버린 머리카락과 다 헤져버린 옷을 입고, 마치 지옥의 사자처럼 서서, 관웅은 말했다. 니가 제일 먼저 보고 싶더라. 진짜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니가 제일 먼저… 생각이 나. 참 우스운 일이지만. 해준은 꿈에서처럼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관웅의 손바닥에 제 얼굴을 부벼대었다. 뜨겁다. 살아있다. 마침내 생생하게 느껴지는 체온에 해준은 안도했다. 관웅은 그런 해준의 얼굴을 큰 손으로 쓸었다. 많이 기다리게 해서 미안. 다정한 목소리도 하나도 변하지 않아서 해준은 관웅의 손바닥을 부여잡고 눈물로 적시며 울었다. 이제야 꽉 막혔던 숨통이 터졌다. 깜깜한 암흑 속에서 구조를 기다리다 마침내 내려온 생명줄을 부여잡고, 해준은 태어나서 첫 숨을 쉬는 사람처럼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

“위치 잡혔습니다. 경호팀 지금 바로 출동바랍니다. 좌표는…”


해준이 쓰러져 있는 동안 상황은 더 긴박하게 돌아갔다. 그래가 신호를 파악해 암호해독 후 좌표를 풀어냈고, 곧바로 하성준 팀장이 있는 경호팀이 출동했다. 한동안 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용했던 사무실이 이상한 흥분으로 들끓고 있었다. 살아있대? 몰라, 살았는지 죽었는지 가봐야…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백기는 해준이 잠들어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죽은 듯이 누워있는 해준의 얼굴은 잠이 들었음에도 그리 평온해 보이지 않았다. 백기는 해준의 구겨져 있는 미간을 문지르다가 강파르게 마르고 색이 죽어있는 얼굴을 조심스럽게 쓸어보았다. 이런 생각하면 나 진짜 나쁜 사람인데,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어. 그래야 당신을 가질 수 있지 않겠어요? 백기는 시한부 같은 희망을 품었다가 내버렸다. 어차피 그가 없더라도 해준은 영원히 제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인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사랑해요.”


이제는 아무 소용 없겠지만.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의료팀으로 실려 들어왔다. 관웅과 의식이 없는 팀원 한 명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기척을 죽이고 기회를 노려 긴 시간 동안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관웅은 그 꼴을 하고도 조금 절뚝거리긴 했지만 자신의 발로 걸어 들어오기까지 했다. 이게 말이 되는 거야? 석율이 벙찐 표정을 했다. 천팀장님 불사신이야 뭐야, 진짜. 팀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환호하며 관웅을 끌어안고 난리였다. 이로써 또 새로운 역사가 쓰여졌다. 영웅담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그 난리통에도, 출혈과 영양 부족으로 인한 어지러운 정신 속에서도 관웅은 해준을 찾았다. 백기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다 관웅을 해준이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니 자리는 여기까지라고, 눈 앞의 사자(死者)가 말했다. 닫힌 커튼을 열고 들어가는 관웅을 보며 백기는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