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율그래] 타이트로프

 

* Re:Born의 스핀오프2 / 역시 전편을 안 읽어도 무방한 얘기

 

 

 

 

 

 

 

 

그래는 흩어진 호흡을 차분히 정돈했다. 현장에서 총 만질 일은 없어도 머리가 복잡해지면 가끔 사격연습장에 오는 것이 최근 생긴 그의 습관이었다. 그래의 쭉 뻗은 오른손에는 구경 9mm의 검은 베레타가 들려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과녁에 집중한 후 방아쇠를 당겼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발포에 의한 반동으로 인해 곧게 뻗고 있던 그래의 팔과 어깨가 살짝 뒤로 밀렸다. 장전한 10발 중에 벌써 9발째였다. 멀리서 봐도 과녁에 뚫린 구멍은 평소와 달리 정 중앙에서 다소 떨어져 여기저기 어지럽게 구멍이 나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 형편 없는 점수였다. 그래는 얕게 한숨을 쉬다가 제 오른쪽에 걸린 누군가의 과녁을 보았다. 정확히 10점을 중심으로 촘촘한 간격으로 다져진 종이가 이미 너덜너덜했다. 펄펙트! 석율의 만족스러운 목소리에 그래는 입술을 비틀었다.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이봐, 장그래. 그렇게 잡념이 가득하면 될 것도 안 된다고.”
“끝났으면 떠들지 말고 자리 좀 비켜주시죠.”
“어떻게, 내가 좀 가르쳐줄까? 일대일로 개인 교습 어때?”
“사양하겠습니다.”


그럼 뭐 할 수 없지. 석율은 영 아쉽다는 듯이 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의 손가락에는 방금 전까지 쓰고 있던 고글이 걸려 달랑거리고 있었다. 수고 해. 석율이 산뜻한 표정으로 눈을 찡긋거리며 그래의 어깨를 가볍게 쓸고는 먼저 자리를 떠났다. 그래는 석율의 손길이 머물렀던 제 어깨를 가만히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누가 누구한테 뭘 가르쳐줘? 웃기고 있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그래는 이번엔 과녁 한 가운데에 점수 대신 석율을 집어넣어 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신중하게 조준을 하고는 마지막 남은 한 발의 방아쇠를 힘껏 당겼다. 쓰고 있던 고글을 벗고 눈을 가늘게 떠 과녁을 확인했다. 정확히 10점. 한 가운데에 명중이었다. 석율의 가슴을 관통하고 큰 구멍이 뚫렸다.












Tightrope
한석율X장그래












한석율이 만만한 사람인줄 알고 있다면 그건 오산이다. 그는 상대의 경계심을 풀게 하고, 원하는 대로 사람을 주무르는 데에 아주 천부적인 소질을 갖고 있었다. 늘 반쯤 나사 풀린 것 같은 얼굴에, 눈을 한껏 접고 활짝 웃거나 콧노래를 부르며 농을 거는 하이 텐션은 이미 석율의 대표적인 아이덴티티였으나, 장그래는 석율의 본질을 애저녁에 파악하고 있었다. 저 웃는 얼굴 밑으로 사실은 상대를 탐색하느라 잠잠히 가라앉아있는 예민하고 날카로운 구석이 있다는 것을 그래는 영민하게 캐치했던 것이다.


“장그래 입니다.”
“아아, 그 해킹 천재 장그래?”


처음 입사 동기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그래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석율이 크게 아는 척을 했다. 반가워요, 난 한석율입니다. 그래는 제게 내밀어지는 손을 빤히 보았다. 그리고 붙잡지 않았다. 그래는 사람을 쉽게 믿지 않았고, 그는 유년기부터 다분히 폐쇄적인 구석이 강했다. 그럼에도 석율은 민망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활짝 웃는 표정으로 제 손바닥을 거두어 싹싹 비볐다. 별로 밝히고 싶지 않았던 거면 미안. 잔뜩 털을 세운 고양이 같은 그래에게 석율이 조심스럽게 얕은 사과의 말을 건넸다. 그래는 별 대꾸를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어차피 삽시간에 누군가의 입을 통해서 소문은 퍼져나갈 것이다. 어쩌면 그게, 이 한석율이란 사람이 될지도 모르고.








해킹 천재란 수식어는 어느 뉴스의 기사에 그래의 이름이 짤막하게 올랐을 때부터였다. 그래에게 해킹은 그저 단순한 취미 생활이었다. 처음엔 장난으로 시작했던 것이 점점 판이 커졌고, 그래는 어느새 제법 규모가 큰 인터넷 해킹 동호회의 유명 인사가 되었다. 20대 초반. 나이도 어렸으니 옳고 그름의 판단보다는 서로 경쟁하듯 과시적으로 결과를 자랑하는 경우가 많았다. 타고난 승부욕에 마침내 건들이지 말아야 할 곳까지 뚫어냈을 때 그래의 학교로 누군가가 찾아왔다. 까만 정장을 차려 입은 사내였다. 평범한 공대생이었던 그래는 그보다 더 까만 세단의 뒷자리에 태워져 영문 모를 사람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이 국가정보원의 어느 누구라고 소개하며 소속도 이름도 없이 번호만 덜렁 적힌 명함을 내밀었다. 장그래 씨, 당신의 선택지는 두 가지야. 빵에 가던가. 우리랑 같이 일을 하던가. 기왕이면 후자가 좋겠지요? 말이 선택이었지 반강제적이었으나 그래에게는 나름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그렇게 마침내, 비합법적인 해커는 합법적인 해커의 길을 걷게 되었다.










*










“4층 내부구조도 확보했습니다. CCTV 위치는 확인되는 대로 체크해서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고생 많았어요.”


그래는 보고와 함께 해준에게 들고 온 메모리칩을 넘겼다. 해준은 고단한 얼굴을 하고는 그래에게 미미한 미소를 지으며 이제 나가봐도 된다고 손짓했다. 잠을 통 자지 못했는지 해준의 눈은 실핏줄이 터져 있었고 입술도 바짝 말라 있었다. 천관웅과 MS-A팀 전원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는 지금,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중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사람은 아마 강해준 팀장일 것이다. 그리고 덩달아 해준이 팀장을 맡고 있는 정보보안팀 소속의 그래도 그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래는 일이 그르치지 않도록 평소보다 신경을 바짝 써야 했다. 늘 단단하고 곧은 나무기둥 같았던 제 사수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잔뜩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에. 더군다나 이번 작전은 준비가 치밀했고 시뮬레이션도 완벽한데다, 그 대단한 천관웅 팀장이 일을 그르칠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었다. 아무래도 내부의 문제가 아닐까 그래는 의심하고 있었지만 확신이 들 때까지 해준에겐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미 과부하가 걸린 머리에 새로운 폭탄을 던져주고 싶진 않았다.








“투입된 게 다섯인데. 어째 살아 돌아온 놈이 하나도 없누.”


퍽이나 심드렁한 말투였다. 석율은 제 품에서 꺼낸 작은 나이프의 날을 가죽 반 장갑을 낀 손으로 훑으며 후후 불어댔다. 날카로운 단면에 제 손가락을 부드럽게 움직이는 꼴을 보며 그래는 인상을 썼다. 저러다 한번 손가락 잘려봐야 정신을 차리지. 보는 제가 다 불안해져서 그래는 괜히 입술을 씹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직 확실히 모르지 않습니까. 여전히 시선은 석율의 손에 고정한 채로 흘러나온 그래의 말에 석율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장그래. 너도 알잖아. 아, 물론 너는 현장 안 뛰니까 모르겠지만, 자고로 경호팀의 라이징 스타 이 한석율님이 봤을 때 현장이라는 건 말이야… 석율의 말에 그래가 또, 또 그 놈의 현장… 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래는 자신의 팀이 하는 백업이 없으면 현장도 없다고 누누이 말했고, 그럴 때마다 석율은 그래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태클을 걸어댔다. 둘이 한참을 투닥투닥하는 꼴을 백기는 멀거니 구경하며 감흥 없는 표정으로 제 손에 쥔 권총을 얇은 천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그나저나 강팀장님이 걱정됩니다. 며칠 내내 계속 저러시는 거 보면.”
“그러니까. 하필이면 천팀장님이 그렇게 되실 줄 알았겠어.”
“아무래도 그쪽에 뭔가가 새나간 게 맞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고서야…”
“장그래, 쉿.”


셋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휴게실 뒤로 해준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국장님께 뭔가 보고를 하러 가는지 손에는 서류가 한 다발이었다. 해준을 먼저 캐치한 석율이 눈치 빠르게 그래의 입을 제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짠맛이 나서 그래가 냉큼 석율의 손을 치워냈다. 왜. 내 손바닥에 뽀뽀한 게 부끄러워서 그래? 그래, 안 그래, 장그래? 이 참에 입술에다 찐하게 한 번 할까? 정말 최악이네. 석율의 대수롭지 않은 농담에도 마음이 널을 뛰었다. 그래는 표정을 들킬까 고개를 팩 돌렸다. 왜, 니가 확실하기 전까진 너네 팀장님한테 말 안 한다며. 석율이 토라진듯한 그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며 말했다. 며칠 전, 자신이 지나가듯 한 말을 석율은 세심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괜히 소식통이란 소문이 난 것은 아니었다. 석율은 돌아다니는 얘기들을 기민하게 파악하고 분석해서 자신만의 데이터베이스에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안에 나는 뭐라고 적혀 있으려나. 정보보안팀 소속의 입사동기1 장그래? 해킹천재로 알려진 장그래? 뭐, 아무렴. 그리 특색 있는 내용은 아닐 것이다.








석율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 게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른다. 석율은 천천히 스며들어와 마른 종이를 완전히 제 색으로 적셔버렸다. 앞서 말한 대로, 그는 상대의 경계심을 풀게 하고, 원하는 대로 사람을 주무르는 데에 아주 천부적인 소질을 갖고 있었다. 그래는 잔뜩 경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덫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빠져들어 허우적대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그건 전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늘 단단하게 둘러졌던 성벽이 석율에 의해 서서히 함락되는 것을 알았을 때 그래는 석율을 더 밀어내려고 발버둥쳤다. 하지만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딱 그 거리만큼 다시 바짝 당겨져 오는 탓에 괴로웠다. 어차피 마음을 주지도 않을 거면서 벗어나지도 못하게 하다니. 여지를 주지나 말던가. 항상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석율의 손안에서 그래는 맘껏 놀아났다. 맛있는 꿀통의 깊이를 모르고 자꾸만 발을 담그고 있는 것과 같았다.


누군가가 철저하게 이중 삼중으로 단단히 봉쇄해놓은 문을 하나하나 따고 시스템에 침입하는 일은 늘 짜릿했다. 그래에겐 그 순간이 늘 희열이었다. 만약 할 수만 있다면, 석율의 마음도 그렇게 열어보고 싶었다. 그래는 석율의 ‘진짜 모습’을 확인하는 첫 번째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석율의 속은 겉보기엔 알기 쉬워 보여도 겪으면 겪을수록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았다. 문을 열면 다음에 또 새로운 문이 끝도 없이 등장하는 미로였다. 어쩌면 그런 것 때문에 그래는 석율을 좋아하게 된 걸지도 몰랐으나 현재로서는 답이 없는 짝사랑에 마음만 괴로웠다. 분명하게 벽을 치면서도 제게 향하는 석율의 웃음, 가볍게 스치는 스킨쉽, 늘 다정하게 대하는 말투에 그래는 몇 번이고 울컥했다. 석율은 그럴 때마다 마치 모든걸 다 안다는 사람처럼 그래의 어깨를 토닥거리곤 했다. 장그래, 커피 한잔 할까. 말을 걸면서.










*










지쳤다. 그래는 이 밀고 당겨지는 애매한 관계에 완전히 지쳐버렸다. 더 이상 혼자 끙끙 앓으며 상처받느니 아예 떨어져 나가버리는 게 낫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는 웬만하면 석율과 마주치는 일을 피하려고 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을 좀 믿어볼 참이었다. 늘 있던 동기 모임도 갖은 핑계를 대며 빠졌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티가 난다고 처음엔 그러려니 하던 백기와 영이도 무슨 일이 있냐고 제게 물어왔다. 하지만 정작 석율에게서는 별 반응이 없었다. 어쩌면 자신의 마음을 눈치챈 순간부터 제 풀에 지쳐 떨어져나갈 때까지 기다린 건 아닐까? 비약인 줄 알면서도 그래는 힘없이 웃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나쁜 사람은 되지 않다니, 참 똑똑하고 영리했다. 잔인하게도.


같은 곳에 근무하고 있으니 아무리 피해도 지나가다 마주치는 일도 있었다. 그래는 평소처럼 자신에게 향하는 석율의 미소에도 평온을 가장하며 고개만 까딱이고는 바쁜 사람처럼 석율을 지나쳤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후에 석율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차마 돌아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서먹서먹한 공기가 두 사람을 휘감고 있었다. 석율과 그래가 서로 당기고 있는 줄은 끊어질 것처럼 팽팽했다. 만약 어느 하나가 손을 놔버린다면 완전히 튕겨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가 그렇게 서서히 쥐인 손의 힘을 풀고 있었던 어느 날 밤, 석율에게서 메세지가 도착했다.


[나 장그래 보고 싶어]


내용은 그게 다였다. 간단했다. 그래는 놓으려고 하는 줄을 이번에는 석율이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 혼자 좋아해서, 당신이 받아줄 생각이 없으니 혼자 정리하겠다고 하는데 이런 나를 좀 가만히 내버려두면 안 되는 거냐고, 석율에게 소리라도 치고 싶어졌다. 늘어질만 하면 당기고, 끊어지려고 하면 느슨하게 만드는 석율의 줄 위에서 그래는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 차라리 담판을 짓는 게 낫겠다. 그래는 정공법을 택했다. 그에게 더 이상 놀아나지 않기 위해 새 판을 짜야 했다.


[만납시다 지금]








고층건물의 옥상은 낮과 다르게 찬 바람만 쌩쌩 불었다. 그래는 그럴싸한 겉옷도 챙겨 입지 않은 채였다. 얇은 드레스 셔츠 안으로 찬바람이 스며들어 열기가 치민 몸을 식혀주었다. 그래는 난간에 기대어 서서 서울의 야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석율을 기다렸다. 그러면서 차분하게 할 말을 정리했다. 한석율씨, 그만합시다. 뭐를 그만하는데? 뭘 시작이라도 했었어야지. 한석율씨, 더 이상 나 헷갈리게 하지 말고 우리 각자 갈길 갑시다. 이것도 이상하다. 착각을 한 건 수를 너무 앞서 생각하는 멍청한 내 잘못일 수도 있다. 한석율씨는 나를 가지고 노는 게 재밌습니까? 나를 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마음을 확실하게 고백하고 확인사살을 받는 것이 차라리 편하려나. 여러 가지 생각에 빠져있을 때 뒤에서 기척이 들렸다. 그래의 어깨에 석율의 체온이 묻어있는 코트가 덮여졌다.


“추운데 왜 이러고 있어. 감기 걸리게.”


하나도 안 변했다. 석율은 다정하게 말을 붙였다. 늘 알게 모르게 세심하게 신경 써주는 배려도 똑같았다. 오랜만에 보니까 더 잘생겼네, 하는 실없는 농담을 하면서 석율이 그래와 똑같이 난간에 제 팔을 얹었다. 우리 장그래는 나 안 보고 싶었어? 난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는데. 물어볼까 말까 하다가 아무래도 안되겠어서. 요새 왜 나 피해? 혹시 내가 뭐… 잘못했어? 동기 사이에 우리 이러지 말자. 응? 줄줄이 이어지는 석율의 말이 그래는 기가 찼다. 또 다 덮으려고. 아무 일도 없었던 일로 돌아가려고 하지, 당신은. 한참 대답이 없던 그래가 제 몸을 돌려 석율을 마주보았다. 차분하게 내려앉은 그래의 표정에 석율이 자동반사적인 것처럼 활짝 눈을 접고 웃었다.


“한석율씨.”
“말해. 다 들을게.”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당신이 날 이렇게 만들었잖아.


“멍청한 척 좀 하지 마요.”
“어?”
“그렇게 웃지도 말고.”
“…장그래?”
“내 마음 다 알면서… 모른 척 하지도 말고.”


좋은 게 좋은 거다.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어영부영 넘어가려고 한다면, 이번엔 제 선에서 그만 할겁니다. 힘들어서 못하겠어요. 좋은 동료, 그런 거 더 이상 못해먹겠으니까. 그러니까 착한 사람인 척, 제발 그만해요. 당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달란 말입니다. 왜냐면 당신은…


“너는, 진짜로, 나쁜 새끼잖아.”


북받쳐 오르는 무언가에 그래의 입술이 덜덜 떨려왔다. 손톱이 파고 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벽장 속에 꾸역꾸역 밀어 넣었던 진심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왔다. 시야가 점점 뿌옇게 번져갔다. 석율이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보이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래는 눈을 깜박였다. 후두둑 맺혀있던 눈물이 지저분한 초록색 바닥으로 줄줄이 추락했다. 석율은,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이야, 나 들킨 거야?”
“……”
“장그래 대단하네.”


거짓말처럼 석율의 표정이 가라앉아 있었다. 날것의 얼굴을 그래는 처음 보았다. 석율은 조금 피곤한 듯 제 미간을 쓸어냈다. 늘 호선을 그리던 입매는 딱딱하게 굳었다. 이제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진짜 나를 알게 되면 후회할지도 모르는데.”
“……”
“그렇게 나를 알고 싶어?”


석율의 표정이 싸늘하게 빛났다. 마침내 착한 사람의 가면을 벗어 던진 석율이 그래에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장그래는 석율의 본질을 애저녁에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저 웃는 얼굴 밑으로 철저하게 숨겨진, 잠잠히 가라앉아있는 그의 어떤 흉폭한 폭력성이나 집착 같은 것은 미처 알지 못했던 거였다. 석율이 그래의 젖어있는 볼에 제 손가락을 넓게 감쌌다. 아무리 당신이 예뻐도 놓아주려고 했는데, 참으려고 했는데 말이야. 이렇게 제 발로 덫에 걸려들어올 줄은 또 몰랐네. 장그래. 왜 그랬어. 석율이 중얼거리며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래의 턱이 벌어졌다. 석율의 손가락은 무자비하게 그래의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부드럽고 통통한 육감적인 입술에 새빨갛게 피가 몰렸다. 석율은 구미가 당겨 입맛을 다셨다.


“장그래, 우리 단 둘이서 술 한잔 할까? 내 방에서 말야.”


우리 조금 더 서로에 대해서 진실되게 알아가는 게 어때? 아직 밤은 기니까 말이야. 마침내 그래는 알게 되었다. 자신이 수면 아래로 잠자고 있던 폭탄의 어떤 스위치를 눌러버렸다는 것을. 이미 시작된 카운트는 숫자가 다 떨어져 폭발할 때까지 멈출 수가 없다는 것까지. 석율은 그래의 희게 질린 얼굴로 제 얼굴을 기울였다. 적당한 각도로 서로의 코가 비벼졌다. 석율은 크게 입을 벌리고 그래의 입술을 한입 배어 물었다. 포식자의 기운 앞에서 그래는 상처 난 날개를 퍼덕였다.













+

 

착한 사람의 연극은 모두 끝이 났다. 그것도 가장 들키고 싶지 않았던 존재에게. 이제는 악인만 남은 건가. 석율은 손 안에 쥔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조소했다. 야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넓은 통 유리창에는 제 침대에 누워있는 누군가의 인영이 비추어졌다. 그래는 몸을 동그랗게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눈물이 채 마르지 않은 볼이 반짝거렸다. 닦아줘도, 또 닦아줘도 그래는 하염없이 울었다. 그래의 하얗고 얇은 어깨는 덜덜 떨렸다. 벗어나려는 발목은 시트만 밀어냈다. 석율씨. 한석율. 정신 차려. 제발… 하지, 마요. 그래는 비명처럼 제 이름을 부르며 애원했었다. 이미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걸 너도 알잖아. 한 번 시작한 것은 멈출 수도, 되돌릴 수도 없었다. 그러게 왜, 후회할 짓을 했어. 장그래. 내가 기회를 줬잖아.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니가 잘못한 거야. 나는 잘못한 거 없어.”


석율은 한숨을 쉬며 신경질적으로 제 앞머리를 쓸었다. 석율은 언제부턴가 그래가 자신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를 이미 체감하고 있었다. 그의 동그랗고 순수한 눈동자는 사랑을 담고 있었다. 애틋했다. 감추고 숨기려고 애써봐도 도무지 숨길 수 없는 게 사랑이라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석율은 무섭고 두려웠다. 이번에도 제 손으로 모든걸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진짜 자신의 모습을 알게 된다면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적당히 가볍고 만만하게, 석율은 동료로서 그래를 대했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사정거리를 유지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진심을 숨기는 일은 석율에게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당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달란 말입니다.’

‘너는, 진짜로, 나쁜 새끼잖아.’


그래는 석율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했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꿰뚫리고 벌거벗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필이면 그게 내가 사랑하는 장그래라니. 잘 참고 견뎌주었던 둑은 강한 자극에 의해 마침내 터져버렸다. 석율은 제 안에서 들끓는 소유, 집착, 광기 같은 것을 잘 알았다. 석율의 사랑은 거칠고 난폭해서 상대를 모조리 파괴해버릴 때까지 멈출 수가 없었다. 과연 장그래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너는 나를 얼마나 견디려나.


“니가 부서져 버릴까봐 겁나. 그래도, 장그래.”


너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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